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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나이2013/05/07 10:21

[현대문학] 201010월호에 발표되었던 권여선의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아주 짧은 제주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2년 반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정우의 동생 도우로부터 그의 어머니가 명이가 제주도에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는다. 정우의 죽음 이후 혼곤한 잠 속에서 자주 찾아드는 격심한 충격을 겪곤 하던 명이는 마치 초식동물과도 같은 도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제주도를 찾고 그곳에서 밥을 함께 먹은 셋은 비자나무 숲으로 가기로 한다. 가는 길 차 안에서 잠깐 잠이 든 명이는 격심한 충격으로 깨어난다. 격심한 충격은 그녀가 2년 전부터 겪었던 환각인가, 아니면 죽음을 맞이한 명이의 실제 감각인가.

 

이십대 중반의 청년에게 2년 반의 시간이란, 몸무게의 반이 줄어들거나 성격이 반대편으로 꺾이는 변화 정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from 권여선,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 숲],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33,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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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구아저씨
책_을 읽다가2013/05/06 11:10

대학을 직장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마치 계절병이라도 앓는 듯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휩싸이곤 한다. 매년 언론기관의 대학 평가 결과가 발표되면 대학 당국과 교수들이 일희일비하는 상황을 목도하면 그 질문에 대한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학자들의 평생의 연구를 책으로 묶어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대학과 학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집단의 침묵을 보다 못해 지인들과 어울려 책을 읽고 지은이의 생각을 듣는 모임을 마련해 자리를 함께 하자고 주변에 청해도 세상의 반응은 늘 싸늘하다. 좋은 모임이 있으니 함께 하자고 권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셌냐는 것. 공부하기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고 목울대를 세워도 듣는 이는 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대학의 모습이다. 마침 이런 울화를 삭혀줄 비슷한 생각을 담은 책이 나왔다.

 

"해마다 학진에 연구비를 신청하는 계절이 돌아오면, 연구보다 연구계획서의 작성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도 이제 아무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다 많은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연구, 그리고 보다 수월하게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주제에 연구자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구 주제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사(硏史)의 내재적 필요에 의해서 연구 주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를 받기 위해 연구 주제를 정하는 것을 나는 허다히 목도한 바 있다. 비유컨대 진리를 깨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지가 되기 위해 출가하는 스님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대학은, '사회'가 아닌 '기업'에 인력, 곧 위계화 된 노동자를 공급하는 취업 기관일 뿐미여,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결정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과 국가를 영원히 재생산하는 장치인 것이다. 좀 더 야박하게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모 기업의 하청업체이거나 기업에 '인적 자원'을 공급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from 강명관, [침묵의 공장], 서울, 천년의 상상, 2013.4(초판 1쇄), 21쪽,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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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구아저씨
소설_공간산책2013/04/25 22:11

박범신의 장편소설 [소금]을 중간쯤 읽었을 때 문득 그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손창섭의 [인간교실]과 유사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트위터를 통해 이 두 소설을 거푸 읽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생각일까 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런 독자로서의 예상이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니 작가 등단 40년이 되는 해에 펴낸 작가의 마흔 번째 장편소설인 [소금]은 아버지 소설이고, 대안가족을 언급한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 박범신은 작가의 말에서 이르길 자본에 대한 작가의 발언을 모아 빚어낸 소설이라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숱하게 언급되는 용어가 흔히 20세기를 가로질렀다고 회자되곤 하는 생산성이라는 단어다. “생산성이란 말도 바로 그렇지. 다른 게 끼어들 틈이 없는 말이거든. 생산량의 증가를 가로막는 다른 것은 모두 불순물이라고 불러. 단연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생산량이란 관점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에겐 해로울 뿐이지.”그러기에 우리네 삶을 몰강스럽게 옥죄는 전 세계적 자본의 폭력성에 대해 끈질기게 발언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끈질기게 발언해야 하는 대상이고 주제하는 점을 각성하고 펴낸 소설이 바로 [소금]이라는 것이다.

 

한 염부(鹽夫)의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전체를 가로지르며 노동력을 따온 아버지에 대한 헌정의 글로 읽힌다. 물론 그것의 좋고 나쁨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에서 후반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치사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불현 듯 가출을 감행하고 혈연으로 묶인 흔한 가족의 울타리와 관계망에서 이탈한 뒤 부랑이 아닌 유랑의 여정을 통해 주체적 삶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새겨볼 여러 장면이 그려지고 있기에 선입견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개인적 소회는 밝힐 수 있으리라.

 

한겨레신문을 통해 연재된 [소금]은 우여곡절 끝에 대기업 상무로서 처지지 않는 일을 해 온 선명우라는 인물이 자신의 막내딸 생일날에 우연한 사고에 편입되면서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회한의 삶을 찾아나서는 기록이다. 반복적이고 세세한 역할극에 불과한 일상을 지속하는 동안 자신의 인생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다주는 기계이며, 아이들과 아내는 자신에게 빨대를 꽂아 진액을 빨아 먹는 것과 하등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집으로 오르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금 장수 트럭의 장애 가족에게 닥친 사고과정에 개입하게 되면서 상황과 조건으로부터의 이탈을 감행한 이야기다. 그리고 손창섭의 [인간교실]에서처럼 대안 가족으로서의 진짜 가족의 의미를 찾게 된다. 작가 박범신은 출간기념회와 작가의 말에서 이르길 [소금]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시작한 소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제법 떠올린다.

 

 

"그녀의 발에 따라 효암서원에 먼저 들렀다. 호암서원은 원래 갈산사(葛山寺)라는 이름으로 가야곡면 다른 곳에 지어졌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의로 1713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워진 서원이었다. 잠겨있던 문이 그날은 삐죽이 열려 있었다.

 

외삼문엔 삼창문(三昌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삼창이 무슨 뜻이에요?” 그녀가 묻고 의로운 기운이 거듭 난다, 뭐 그런 뜻이야.” 내가 대답했다. 병든 노모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해서 강응정 선생이 하늘에 기도했더니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외삼문과 짝맞춘 내삼문 추녀 밑 편액엔 효의문(孝義門)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가 모현재(慕賢齋) 마루 끝에 앉았다.

 

새들이 연방 호수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햇빛이 쏟아졌다. 세상의 맑고 정결한 것들만 모아 빚은 게 햇빛 같았다. “기록에 따르면.” 내가 말했다. “성종 임금께서 중화재 선생의 효행을 전해 듣고 손수 글씨를 써 내려주었는데 갈마산십리(葛麻山十里) 인계일곡(仁溪一曲)”이라 쓰셨대. 갈마산 십리에 어진 계곡이 한 굽이 있다 하셨어. 중화재 선생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벼슬을 마다하신 분이야. 종신성효(終身誠孝)라고 해서, 임종 때 부모 곁에 있는 게 효도의 으뜸인지라, 선생은 명리를 멀리 하고 병든 노모 곁을 지킨 거지.“

나는 서원에 걸린 포양문(褒揚文)’을 인용했다.

 

이용재라는 이가 쓴 포양문엔 논어에서 말하기를 효도란 사람됨의 근본이라 하였다. ()이 본체가 되는 것은 하늘과 같으니 하늘이 덮어두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고, ()가 쓰임이 되는 것은 인()과 같으니 인이 용납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효도가 사람에게 끼침이 미극하고 매우 크다라고 쓰여 있었다.“

 

from 박범신, [소금], 서울, 한겨레출판, 20134(초판 1),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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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구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