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주택백과2013.12.10 21:52

모던 걸의 연애와 문화

지금은 촌티가 줄줄 흐른다는 이유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입 밖으로 내놓기에 여간 쑥스러운 말이 아닌 연애(戀愛)’라는 명사가 이 땅에 처음 등장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0년경이다. 물론 자유연애를 줄여 부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거쳐 식민지였던 당시 한반도에 출몰한 신조어였다.

 

이 말이 날개를 달고 퍼지기 전에는 청춘남녀가 바짝 붙어 거리를 활보할라치면 남자는 부랑아요, 여성은 탕녀로 불릴 정도로 조선은 엄숙한 나라였지만 소위 신문물과 신식교육의 세례를 받은 청춘남녀가 신인류로 등장하면서 그들을 일컫는 모던 보이모던 걸의 자유연애 행각은 어르신들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춘남녀들의 부러움을 사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애와 더불어 문화라는 구호를 줄기차게 외쳐대기 시작했고, ‘자유연애와 더불어 문화주택은 이들이 욕망하는 새로운 생활이자 주택으로 각광을 받았다.

 

지금은 벌써 80여 년이 흐른 그 시절의 실렸던 만문만화(漫文漫畵) 한 편을 살펴보자.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는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한 뒤 귀국하여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다 동아일보를 거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가상소견’, ‘못된 유행’, ‘11등의 만문만화를 연재했는데 1930112일자 만문만화는 매우 흥미로운 세태 비판으로 읽힌다.

 

19301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 여성선전시대가 오면조선일보

 

만문만화의 내용은 1930년대에 들어서며 신여성들의 노출이 심해진 세태를 꾸짖는 것이다. 한복 대신 양장을 택한 모던 걸들의 짧은 치마 밖으로 드러난 다리가 사나이들의 눈길을 끌지만 속물적인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여성들의 육체가 상품화되는 상황을 개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 여성들의 다리에 써 넣은 문장들인데, 전차의 끄트머리 좌석쯤에 앉은 여성의 다리에는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 피아노 한 채만 사 주면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돈과 재물, 그리고 서구에 대한 선망이라는 당시의 대중적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주택이란 것이 소위 서양풍의 주택을 말하는 것이어서 서구문화에 대한 쏠림현상이 심했다는 것이니 이를 누릴 수 있는 부류는 새롭게 자리한 전문직업인이거나 혹은 먹고 살 것이 제법 마련된 일부 상류층에 허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1935년에 발표된 유진오의 소설 <김강사와 T교수>는 시간강사인 나약한 지식인 김만필과 교활하고 세속적인 T교수를 등장시킨 일제강점기의 작품인데, 이 소설에도 문화주택이 등장한다. 당연히 모던 보이였던 T교수의 집이 문화주택이다.

 

“T교수는 이곳서도 단골손님인 듯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고 하며 술을 먹었다. 두 사람이 오뎅집을 나왔을 때에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이번에는 김만필도 상당히 취했으나 정신은 도리어 똑똑했다. 삼월백화점 앞에 와서 T교수는 단장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김만필이 사양하니까, 전차도 끊어졌는데 걸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집에 갈려면 어차피 자네 집 앞을 지나니까 같이 타자고 억지로 태웠다. ‘우리집을 아십니까?’ 김만필은 자동차가 움직이자 물었다. T교수의 훌륭한 문화주택이 김강사의 하숙 근처에 있는 것은 자기도 잘 알고 있었지만 뒷골목 속 더러운 그의 하숙을 T교수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또 다른 만문만화를 하나 더 보자. 1930414일자 같은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일일일화(一日一畵)’라는 연재물로 소개된 이 만문만화 역시 안석주가 쓰고 그린 것인데, 제목이 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제목으로만 뜻을 살피자면 당시 유행하는 문화주택이라는 것이 대부분 빚을 지고 얻는 것이어서 그곳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며칠 살지도 못하는 모기와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허식과 치레 그리고 은행자본의 농간을 꿰뚫고 있는 시선인 것이다.

 

193041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 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 조선일보

 

요사이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데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거뜬하게 짓고서 스위트홈을 삼게 된다. 그러나 지은 지도 몇 달 못 되어 은행에 문 돈은 문 돈대로 날아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뿐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文化住宅)이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대부(貸付)라고 쓰인 긴 쇠사슬로 은행이 집을 옭아매고 있고 풍경은 유행과 허례를 좇아 문화주택을 취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사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등장한 하우스 푸어에 다름 아니다.

 

문화주택과 경성의 토막민

19311128<조선일보>의 만문만화는 ‘1931년이 오면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문화주택은 1930년에 와서 심하였는데 호랑이 담배 먹을 시절에 어찌 하야 재산푼어치나 뭉뚱그린 제 어미 덕에 구미의 대학 방청석 한 귀퉁이에 앉아서 졸다가 온 친구와 일본 긴자에 갔다 온 친구들과 혹은 A, B, C나 겨우 알아볼 정도인 아가씨와 결혼만 하면 문화주택! 문화주택하고 떠든다. 문화주택은 돈 많이 처들이고 서양 외양간 같이 지어도 이층집이면 좋아하는 축이 있다. 높은 집만 문화주택으로 안다면 높다란 나무 위에 원시주택을 지여놓은 후에 스위트 홈을 베푸시고, 새똥을 곱다랗게 쌀는지도 모르지.”

 

우리말 쓰기에 맞춰 인용한 만문만화의 내용을 곱씹자면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계층은 부모덕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거나 외국에 한 때 기거했던 사람들이며, 소위 신여성과 결혼하려면 남성은 문화주택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게다가 문화주택 여부의 판단은 주택의 외양과 내부는 물론이려니와 2층이라는 조건이 상당히 중요한 판단기준이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삶을 의탁한 사람들이 바로 스위트 홈이라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축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서양풍의 느낌이 강한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불렀다는 기사와 함께 소개한 서양식 주택 近代日本住宅史

 

문화주택이라는 용어는 1922년 일본의 평화기념 동경박람회에서 14채의 주택이 실물로 전시되면서(문화촌)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뒤 그대로 식민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인데 과학적 생활의 보장을 위한 일광과 통풍 등을 위해 유리창이 많았으며, 미백주의의 강조로 빚어진 순백의 커튼과 서양풍 입식생활을 보장하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신문물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와 축음기 등과 같은 근대적 이기물이 놓인 거실 등을 갖춘 집으로 표상되었다.

 

안석주의 만문만화에서 보듯이 한반도로 유입된 문화주택은 일제에 기생한 특권층이거나 고급관리 혹은 경제계층으로 본다면 상류에 속하는 부류가 향유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조선은 부의 편중이 심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제에 빌붙은 사람들이 문화주택을 향유할 수 있는 재력과 특권을 가졌던 바, 일반 대중들은 이들을 얼치기 서구문화 예찬론자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문화주택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주택은 모든 이들에게는 동경과 욕망의 구체적 대상이었다. 1930년대에 발간된 <신여성>, <신가정>, <여성> 등 여성잡지에서 문화주택을 방문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가정탐방기’, ‘가정태평기’, ‘당대여인생활탐방기’, ‘명사가정부엌참관기등이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19379월호 잡지 朝光(조광)에는 음악가 계정식이 실제 지은 집이 묘사된다. 1936년에 신축한 이 집은 72평의 대지에 18칸의 공간으로 구성된 방 3개짜리 문화주택이었다. 방들 사이로 복도가 지나고 집안에 부엌과 목욕실이 있지만 부엌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없도록 집 뒤편에 두었으며 장독대와 김치를 저장하기 위한 지하실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를 소개한 기사를 살펴보자.

 

서대문 밖 연희장(延禧莊) 문 주택지 중에도 가장 아담한 곳! ... 남향한 문화주택 전면은 모두 분합을 드리고 유리창을 하여 창만 열어젖히면 바람과 일광이 맘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부엌은 뒤로 붙여서 보이지 않고 방 만이 순백의 커튼 아래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뜰 앞 정원에는 조그마한 밭이 있어서 이집 주인들이 좋아하는 온갖 물건을 심어놓았다.오른쪽(右便) 방은 계씨의 방, 그 다음이 부인의 방이요 그 다음이 시어머니 방인데 가운데로 복도가 있고 뒤로는 부엌과 목욕실과 지하실이 있다. 그리고 시멘트로 장독대를 만들고 장독대 밑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이 지하실은 김치광이라고 부인은 설명해 주신다. 이 집은 작년에 건축한 집으로 도합 4천원을 들여서 신축하였다고 한다.”

 

문화주택에 대한 대중적 비난은 1930년대 당시 경성의 인구가 40만 정도인데 흙이나 움막으로 비바람을 가린 토막민(土幕民)의 숫자가 16천에 달하는 상황에서 문화주택이 들어서면 주변의 땅 값이 급등하여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고 그 지역에 살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다시 변두리로 밀려나야만 했다는 사실에서도 수긍이 간다. 이러한 상황을 빌어 그로테스크한 대조라 언급한 신문기사도 등장한다. 1930822<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아이러니도 가지가지 3-紅綠瓦(붉고 푸른 기와)의 문화주택, 토막민의 고열이 인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이다,

 

남산 허리를 둘러 안은 왜성대와 욱정(倭城臺旭町, 지금의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 길야정(吉野町, 지금의 중구 도동) 일대에는 남촌 시민들의 부유한 근래적 저택의 빨간 지붕과 파랑 지붕이 나란히 하고 둘러졌다. 그러나 다시 시전이 길야정 이서북으로 터진 일대의 공지로 향하고.土窟(토굴)을 가린 토막민의 수십 채 움집이 언덕 위에 늘어선 이층 삼층의 산뜻한 문화주택 발아래 깔려있다. 내리 쪼이는 석양의 斜陽(사양)이 질서 없이 덮인 함석지붕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른다.이것이 현대가 꾸며놓은 너무나 심각하고 참담하고 그로테스크한 대조가 아니고 무엇이냐.”

 

문화촌과 문화아파트

문화주택과 식민지 백성의 빈민굴이 공존하는 상황은 당시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자 풍경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문화주택은 다른 주택과 그 양식이나 내용이 다른 전형으로서의 주택이 아니라 결국 지식인층의 기호품이거나 권력자 혹은 부호들의 장신구쯤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57년 김용환 화백이 그린 즐거운 문화촌대한주택공사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친 이후에도 문화주택은 대중들의 이상향이었다. 대한주택공사가 분양한 단독주택지에는 문화촌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할부로 구입할 수 있는 아파트단지 분양광고물에도 문화촌이 내걸렸다. 뿐만 아니다. 1963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8개월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손창섭의 장편소설 [인간교실]에서도 문화주택은 여전히 건재한 채 등장한다.

문화촌아파트 분양광고물 대한주택공사

 

주인갑 씨가 자기 집 옆방을 세놓기 시작한 것은 6.10 화폐개혁 이후부터의 일이다. 자유당 시절에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했던 비닐 중심의 무역업이 들어가 맞아서 돈이 좀 돌 때, 손수 설계도 하고 꽤 공들여 지은 집이다. 한강이 눈 아래 굽어보이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숲이 우거지는 속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70평 남짓한 대지에 빨간 벽돌로 벽을 두껍게 쌓아올리고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얹은 25평짜리의 제법 아담한 문화주택인 것이다.... 한강 인도교 부근이나 노량진 쪽에서도 단박 눈에 확 띄도록 새뜻하고 이채로운 외풍을 갖추어야 한다면서 굳이 선혈색 빨간 벽돌 벽에 일부러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주문해다가 지붕을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현관 양쪽에 하얀 돌기둥을 세우고, 멋진 베란다를 만들고, 문틀에는 돌아가며 눈이 부시도록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창문마다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커튼을 드리우게 했던 것이다.”

 

문화를 말하며 문명을 지시하는 일

문화란 일본인들이 독일어인 쿨투어(Kultur)를 번역해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에서 사용한 말이기도 하다. , 형벌이나 위력을 사용하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 문치교화(文治敎化)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번역한 문화가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의미를 말한다면 중국에서의 문화는 ()에 대립하는 ()‘으로 무력이나 형벌의 반대편에 서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가 문화에 녹아있는 셈이지만 주택과 결합하면서는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주택이라는 뜻을 강하게 풍겼다. ’문화주택이나 문화촌이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문화생활이란 단어를 심심치 않게 내뱉는 이유다.

 

, 문명은 물질이고, 문화는 정신인 까닭에 문화란 문명보다는 고차원의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채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정신의 기초를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 둔다면 그 앞날은 지극히 불투명하고, 푯대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법 많은 관객을 불러보았던 <말하는 건축가>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건축가 정기용의 생생한 말이 담겨 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답도 이 땅에 있다는 것이니 문화융성의 시대라는 구호에 앞서 마음에 두고 곱씹어야 할 말이다. ‘문화를 말하며 문명을 지시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끝.

 

이 글은 야나부 아키라가 짓고 박양신이 옮긴 한 단어 사전, 문화(푸른역사), 권보드래 지음,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대한주택공사에서 발간한 대한주택공사 이십년사, 대한주택공사 삽십년사등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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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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