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한국주거사2013.11.20 15:09

21세기 문학2012년 봄호부터 2013년 여름호까지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한 소설에서 200자 원고지 450여 장을 들어낸 뒤 단행본으로 출간된 김원일의 장편소설 [아들의 아버지]는 해방과 전쟁 사이의 시공간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롭게 복원한 소설이다. 작가는 애초에 이를 르포식으로 서술하고자 했고, 작가의 유년시절과 아버지의 생애를 사실 그대로 언급하려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런 의도는 작가가 너무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헤어진 까닭에 여러 장면은 추측과 허구로 채웠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소설 속의 많은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해방 전후사의 여러 정황들에 대해서는 각종 전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등 르포로서의 격을 갖춘 소설이기에 읽으면서도 통상 알고 있던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 자꾸 떠오르며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적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사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대한 비극 앞에 던져진 슬픔의 덩어리였고, 최소한의 사회적 단위인 가족들에게도 이는 엄연한 사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 김원일의 아버지를 복각한 이 소설은 결국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이들의 기억이나 체험과 중첩되었을 것이고, 현실 앞에 던져진 엄연한 슬픔 역시 한반도를 짓누른 검은 구름과도 같았으리라는 점에서 비극의 현대사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작가의 나이 여덟에 헤어진 아버지는 작가와는 다른 삶을 살았고, 그 분이 걸었던 길은 고루살이 대동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좋게 말해 혁명가의 길을 걸었고, 나쁘게 말해 사상에 미쳐 가정을 버린 작가의 아버지는 얼만 전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작가는 작가로서의 부채 의식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복각하지만 내심으로는 불행한 시대의 어둠 뒤편으로 사라진 서러운 영혼들을 위한 진혼의 글을 바친 것이다.

 

고모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1949년에 들어 설을 앞둔 1월 하순이었다고 한다. 묵정논의 들녘을 휩쓰는 겨울바람이 매웠다. 물통걸의 수리조합 직원들의 사택은 일제 때 일본인 직원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었다. 조선식 가옥구조가 아닌, 오늘의 아파트식으로 도르래 달린 유리문을 젖혀야 집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신발 벗는 좁은 현관이 있고 마루가 나섰다. 양쪽에 다다미 깐 방 두 개에 변소는 바깥에 있지 않고 집 안 뒤쪽 구석에 배치했다.”

 

출처 : 김원일, [아들의 아버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3.9, 224~225

 

우리가 도착한 곳은 퇴계로 4가 부근으로, 큰길에서 비껴난 한적한 골목 안의 어느 적산 가옥 앞, 묵정동이었다. 해방 전 일본인 중산층 거주지역으로 시멘 담장이 길게 쳐진 집이었다. 아버지가 철대문을 두드리며, 여기가 정진택 사장 집이라고 어머니께 말했다. 정진택 씨는 어머니도 안면이 있는 아버지의 고향 친구였다. 정씨는 마산에서 고학으로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하자 일찍 경성으로 올라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영진공업사에 서기로 취직했다. 그는 명절이나 집안의 길흉사 때면 진영 읍내 선달바우산 뒤 하계리로 환고향했다. 고향에 들르면 이버지를 비롯한 동급생 죽마고우들을 만나고 갔다. 따로 살림을 날 동안 당분간 정 사장집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아버지가 어머니께 말했다. 우리가 도착한 저택은 해방 전까지 영진공업사 사장 집이었는데 일본인이 본토로 돌아가자. 회사의 조선인 중에 직급이 높았던 정진택씨가 회사에 사장 집까지 물려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어머니한테서 들었지만 정씨는 서울 색시를 얻어 결혼했는데 처가가 동대문시장에서 큰 포목점을 했기에, 일본으로 귀향하는 사장에게 적잖은 금덩어리를 주고 회사와 집을 인계받았다는 말이 있었다.”

 

출처 : 김원일, 위의 소설, 231~232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공간산책2013.03.07 14:05

소위 경제관련 부처에 소속된 엘리트들의 권력 야욕과 국제적인 돈의 전쟁을 가상소설로 그린 우석훈의 [모피아]는 경제민주화를 향한 길에 암초 역할을 하는 내부의 적들이 바로 모피아(MOFIA)라고 전제하고 그들의 행동 양식과 생각의 내면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판타지 소설이기도 하다. [88만 원 세대]를 쓴 경제학자가 이번에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한국사회를 해부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작가의 말을 읽어본다면 픽션이라기보다는 팩션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세상살이가 어려워져도 착하디착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탓이 오히려 자신에게 있음을 원망하면서 오늘도 그저 묵묵히 팍팍한 삶을 꾸리는 현실에 대해 일종의 답답함을 대중적으로 알리고자 애쓴 호소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소설의 복판에서 서사를 지탱하는 소설 속 인물 오지환은 아내와 사별하고 오랜 동안 딸 하나를 데리고 강북의 다세대주택에서 자신이 믿는 일이 곧 정의라는 생각으로 삶을 꾸려가는 한국은행 팀장인데 어느 날 갑자기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오현도라는 사람에 의해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지근거리에서 지원하는 청와대로 들어간다. 그곳 역시 권력의 암투가 반복되는 곳이지만 자신이 감내해야 할 일을 챙기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는 바람에 혼자 남겨진 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인데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모피아 집단에 의해 총리가 정해진 뒤 한국은행으로 돌아갈 것을 예상하던 어느 날 대통령의 방문을 맞는다. 그리고 특보에서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경제민주화를 저지하려는 거대한 음모와 암투!’라고 쓰인 소설 표지의 설명과 검은 손에 쥐어진 돈이 도드라져 보이는 소설 표지를 살핀 뒤 바로 이어지는 작가의 말에는 2012년 대한민국 공직사회를 보자는 말과 더불어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교수와의 만남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국민경제수석을 지낸 정태인 원장을 만났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픽션 그것도 판타지의 형태로 사건의 단면을 실루엣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질 않는다. 물론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지금 서울의 명동은 일반 대중들이 보는 명동과 사뭇 다르다. 소설에서 언급한 경성의 혼마치로 명동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명동 아가씨]도 있고, 낭만 시대의 명동은 [명동백작]을 통해 살필 수도 있다.

 

 

명동의 밤길은 B급 정서가 표출할 수 있는 최대의 화려함을 가지고 있다. 일제 때 총독부에 모여든 자본이 한참 명동을 멋들어지게 꾸몄다. 동경의 멋쟁이들에게는 경성 혼마치에 가본 경험이 모던 보이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했다. 지금은 동경의 오래된 바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맛깔스러움을 보존하고 있지만, 30년대에는 혼마치의 바들이 동경보다 더 세련되고 모던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당시 동경은 이미 정치의 도시를 넘어 군인들의 도시였지만, 패배한 나라에서 명동을 꾸몄던 것은 순전히 상인들 그리고 돈의 힘이었다. 군인들은 상인들의 문화적 세련됨을 따라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상인들은 정말로 문화를 만들어내는 문화생산자들의 기획력을 따라오지 못한다. 토건 시절에 되는대로 지어 올린 건물들과, 용도를 잃어버린 쇼핑몰들을 B급 호텔로 바꾼 그 기괴함이 명동의 어중간한 B급 정서를 만들어내는 주체이다.”

 

from 우석훈, [모피아], 파주, 김영사, 2012.11(11), 69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공간산책2011.05.02 23:17

제5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라는, 1974년 생인 젊은 작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워보이는 시대적 배경을 바닥에 깔고 그려낸 코믹 연애소설이다.

자신을 배신한 바람둥이이자 비밀 결사조직의 독립투사인 애인 '조난실'을 찾아 경성거리를 헤매는 자칭 낭만의 화신 '이해명'이 펼쳐가는 소설속 스토리는 가히「이수일과 심순애」의 패러디로 불릴만한 소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카페의 이름 ‘아틀란티스’나 ‘스타박스’, 비밀댄스모임인 황당한 이름의 ‘이십세기모던이미지댄스구락부’ 등은 모두 현재적 시점에서 허구로 만들어진 과거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1930년대와 2000년대를 동일시하고 일제 치하의 경성과 21세기의 서울을 중첩함으로써 시간적인 연속성과 불온의 연속 그리고 현재 서울의 뒤틀린 풍속도를 비유삼아 톡톡튀는 언어로 그려낸 것이다.

작가는 신인작가상 수상 후 어느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한 세기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역사적 비극과 시련을 헤쳐나가기 위한 한국사회의 중압감을 못 견뎌서 우리 시대 최고의 암흑기로 시간여행을 가보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 소설이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실은 이 소설에서 중시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풍자적으로 그려 우스꽝스럽게 읽어내는 글이기도 하다. 패러디「딴지일보」에 대한 기성세대의 기상천외함과 경망스러움 지적이 딴지를 만드는 이들을 철없는 반항아로 치부하듯 젊은 작가 이지형의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역시 역사를 뒤틀어버리는 딴지풍의 소설로 대중에게 읽힐지 모를 일이다.

이 소설에서 총독부 조사과 ‘대경성신도시계획회의’라는 연구부서에 근무하는 이해명이 하는 일이 비록 식민시대 강점자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시계획이라 하더라도 ‘총독부에서 통계내고 줄을 긋는 일’로 묘사하고 있음은 오늘날의 공간환경에 간여하는 소위 전문인들에 대한 조롱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전차가 멈추는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맨 앞에 서 있던 나를 밀치면서 내렸다. 그들은 일제히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는 뛰었다. 모두 검은 코트의 단춧구멍 같은 어두운 골목 속으로 잘도 숨어 들어갔다.
나는 그냥 전찻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순식간에 나는 젖었다. 종로 네거리 그 수많은 사람들과, 빌딩들과, 간판들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젖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는다면 제일 먼저 마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멍청이 서 있는 나를 향해 검은 색 포드 세단 한 대가 바로 무릎까지 무섭게 돌진해오더니,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 소나무 땔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삐거덕거리며 헤매는 사이, 회색 비크 택시가 짜증스럽게 클랙슨을 울려댔고, 그 옆으로 출장 기생을 태운 인력거꾼이 지카다비를 힘차게 구르며 내달렸다. 발판에 가야금을 꼿꼿이 세우고 앉은 기생이 쫄딱 젖은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스쳐갔다.
어느 새 전차가 푸우푸우 물길을 헤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완벽히 젖은 난, 더 이상 젖을 수도, 더 이상 운이 없을 수도, 더 이상 슬플 수도 없었다. 나도 전차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이 빗물에 잠겨버리기 전, 어서 빨리 아틀란티스를 찾아야만 했다."

from 이지형,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문학동네, 2000년 9월, 7~8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1.01.30 21:29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오모니(하녀)는 조선여성 취업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었다.(참고 전봉관의 ‘경성기담’ 107쪽 그림) 이런 와중에서 빚어진 조선인 하녀나 식모에 대한 일제의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인간 이하의 학대와 식모를 둔 가정집 식구들의 학대 등은 1931년 7월 31일 부산의 초량정 철도국 운수사무소 소장인 다카하시 마사키(大橋正己) 집에서 일어난 하녀 ‘마리아’ 참살사건으로 충분히 집작할 수 있다.

사건의 내용은 이러하다. 집주인인 철도국 운수사무소 소장 다카하시 마사키는 사흘 전 일주일 예정으로 진주 방면으로 출장을 떠났다. 집에는 갓 스물을 넘긴 조선인 하녀 마리아와 서른 여섯의 안주인인 다카하시 히사코(大橋久子) 둘만 남았다. 다음 날인 8월 1일 아침 마리아는 목에 비단허리띠가 조여지고 음부는 잔인하게 칼로 난자당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안주인인 다카하시 히사코와 그의 정부인 이노우에 슈이치로 둘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였다. 그러나 수사당국은 시종일관 다카하시 히사코를 싸고 돌다가 마지막에는 이노우에 슈이치로마저 무죄로 방면하였다. 하찮은 조선인 하녀 때문에 일본의 고관 부인이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부조리가 널려 있던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백성은 이런 슬픔을 감내할 수박에 없었다.

"(1931년 7월 31일) 한여름 밤 일본관리의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하녀 마리아는 변흥례라는 조선 여성이었다. 변흥례는 1912년에 천안군 성환면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열 살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
열일곱 살 되던 해에는 고향을 떠나 경성으로 가서 일본인 집의 하녀가 되었다. 일본인 주인은 조선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고 변흥례를 마리아라 불렀다. 한 해 두 해 지나 마리아는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주인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자, 주인은 착하고 일 잘하는 마리아를 친구에게 소개했다.
마리아가 옮겨간 곳은 총독부 철도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다카하시의 용산 철도국 관사. 아이도 없이 주인과 안주인 단둘이 사는 단출한 가정이었다. 이 집에서도 마리아는 성심성의껏 일했다. 1931년 봄, 다카하시가 부산 철도 운수사무소장으로 영전하자 마리아도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마리아는 달마다 15원씩 받는 월급을 모두 부모에세 보낼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데도 일본말을 비교적 유창하게 구사할 만큼 영민했다. 싹싹하고 눈치도 빨라서 퇴근길 주인의 표정만 보아도 저녁상에 맥주를 올릴지 청주를 올릴지 알 수 있었다.
마리아는 미인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명랑하고 육체가 풍만하며 특이하게 성적으로 매력을 끄는 묘한 여성이었다. 그의 얼굴은 검었으나 애교가 흘러서 누구나 좋아했다. 통통한 육체와 몸맵시는 간드러지지는 못하였으나 20세의 젊음과 탄력이 있어서, 장사치와 철도 관계자 등 뭇 남자들의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마리아는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이나 되었고, 보통 남자 이상으로 힘이 셌다. 40킬로그램 되는 물건을 들고 2-3킬로미터는 예사로 오갔다. 그런 마리아가 어느 날 아침, 혈흔이 낭자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 다카하기 부인은 바로 옆방에서 하녀가 살해당하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from 전봉관, [
경성기담(京城奇談)], 파주, 살림, 2006.7 초판, 85~86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공간산책2010.12.14 11:31

일제강점기에 경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충실하여 도시의 산업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한 역사 속의 인물 이재유(李載裕)와 그 주변인들의 일생을 소설로 복원한 동시에 동시에 해방 후 남로당 총책으로 활동하던 김삼룡과 지리산 빨치산의 총대장이었던 이현상 그리고 당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모던 걸이 아닌 현장전문가로서의 지식인 여성들과 그밖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그려낸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는 1930년대의 경성을 중심으로 벌였던 강점기 식민지배 국가의 사회주의 운동과 그들의 비극적 사랑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안재상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는 그 이념의 좌우에 앞서 식민지 운동가들이 이루어내고자 했던 식민지의 처절한 현실의 극복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민중적 삶의 다양한 양태를 사실에 가깝도록 복원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정확한 가담자만 이백 명에 이른 경성 트로이카가 다시 경성재건그룹으로 외양을 바꾸었다가 또 다시 경성꼼그룹으로 조직을 탈바꿈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모임과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펼친 현장활동을 소설석 서사로 새롭게 꾸민 이 작품은 강점기 조선인들의 선구자적 삶을 그대로 복원하였다는 점에서 지금은 잊혀진 한 때의 과거라 할 수도 있지만 근대도시의 노동자들에게 식민 치하의 사회주의 운동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낸 동시에 당시 민족주의 운동가들과의 차별성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비록 소련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 등으로 인해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을 맞았고, 동서의 차가운 대립이 이제는 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이 작품은 사회주의를 신봉하였던 식민지 치하의 청년 한국인들의 기개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장안을 뒤덮을 때 경성의 한 귀퉁이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민중들의 삶을 걱정하는 농군으로, 혹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봉제공장에서 임금착취와 노동착취의 중압감을 온몸으로 견딘 사회주의 지식인 노동자들의 현장활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과거의 잊혀진 인물들의 복원이 가지는 정신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식민도시 경성의 타율적 변화과정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당시를 살았던 분 가운데 생존한 인물을 찾아 아스라한 그들의 기록을 녹취하고 강점기 사회를 연구하는 전문가를 찾아 당대의 사회주의 운동을 논문이 아니라 대중적 일상의 형태로 다시 그려낸 작가의 열성은 식민치하의 경성에서 활동하였던 수많은 운동가들의 열성에 대한 현재적 의미의 보상으로서도 그 의미를 재평가할 수 있다. 안재상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통해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던 식민지 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민족애를 확인할 수 있으며, 자생적이지 못했던 한국의 근대와 그 도도한 흐름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주인이 되는 이상사회와 그 이상을 지원하는 국가의 건립을 향해 처절하게 몸부림친 혁명가들의 운동과 사랑을 눈물로 확인할 수 있다.

"독방만 나란히 있는 사동이었다. 가로 1.4미터에 세로 2.5미터쯤 되는 좁은 방안에 들어서자 무거운 나무문이 닫히고, 이재유는 적막 한가운데 홀로 섰다. 마루방 한가운데에는 한 장의 누더기 같은 돗자리가 깔려 있을 뿐,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이라고는 회벽 여기저기 빈대를 눌러 잡아 생긴 작은 핏자국뿐인 비좁은 공간이었다. 창문은 제법 커서 유리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었으나 창문 바깥쪽에 박힌 굵은 쇠창살이 마음까지 답답하게 했다.
창문 밑에는 나무 칸막이 너머로 이동식 나무 변기가 놓여 있었고 입구의 오른쪽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삼각대 위에 양철로 만든 세면기가 올려져 있었다. 물이 담긴 세면기 속의 걸레 한 장, 빗자루와 쓰레받기, 너덜너덜하고 냄새나는 이불과 기와 모양으로 만든 목침이 감방 비품의 전부였다.
밖에서 굳게 잠긴 출입문 위에는 조그만 감시 구멍이 있고 아래쪽에는 음식과 차입물을 넣는 구멍, 그리고 비상시에 나무토막을 복도 쪽으로 튀어나가게 해 간수에게 구출 신호를 보내는 패통이 있었다.
조명이라고는 옆방과 같이 사용하는 조그만 전구가 달려 있는데 두꺼운 벽을 뚫은 구멍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벽 바로 아래에는 빛이 미치지를 않았다. 밤새 희미하게 밝혀진 전등은 감방 안을 마치 황혼이 뿌려진 늦가을 저녁처럼 늘 우울하게 만들었다. 앉은 채 한 바퀴 빙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져 버릴 듯 숨이 막히고 갑갑했다.
읽을 수 있는 책은 한정되어 있었고 편지도 마음 놓고 쓸 수 없고 집필을 할 수도 없었다. 사상범 예비구금에는 시한이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했지만 탈출은 불가능했다."

from 안재성,[경성트로이카], 
사회평론, 2004년 8월, 293~294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0.11.30 20:49

1936년과 1937년을 통해 《조광》에 연재되었던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1938년에 같은 이름의 소설집 《천변풍경》으로 출간되었다. 1930년대 서울의 광교 일대 청계천변 사람들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임화에 의해 ‘세태소설’로 치부되지만 당대의 조선 최고의 문인으로 불리던 이광수에 의해서는 그것이 절대 세태소설로 치부되어야 할 단품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만년 작품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서 인류의 문학적 작품들의 반열에 들어가야 할 만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본격적인 근대 도시소설을 생산한 박태원의 연속적인 도시풍경 스케치를 통해 독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1930년대 모습을 복원할 수 있으며, 식민지 도시의 비루한 삶과 그 안의 인간군상들과 만나게 된다.

① 1930년대 중반까지도 취사재료와 난방재료가 경성 한복판의 경우에도 땔감 나무였다는 사실

"어느 날 낮에 장작이 한 마차 들어와, 그것은 마땅히 행랑아범이 있어 가지고, 헛간에 쌓는데 거들어야 하고, 또 당장 저녁에 땔 것만이라도 단 몇 단, 우선, 패어 놓아야만 되는 것을 대체 어데로 무엇을 하러 갔는지, 만돌 아비는 암만을 찾아도 보이지 않아, 그래, 꾸지람은 어멈이 혼자 도맡아 받고, 그리고 혼자 좁은 가슴만 태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날 밤의 일이다.
밤 
열시나 거운 되어서, 술까지 잔뜩 취하여 가지고 돌아온 애 아범을 보고, 만돌 어미는, 이내 참지 못하고,
「아아니, 그래 바쁜데 일은 안허구 어딜 또 갔었수!」
마디 불만을 토하여 놓았다. 여기서 만약 자기네들만이 사는 집이라면, 이제까지나 마찬가지로, 불행한 계집은, 결코 그러한 말 한마디 입 밖에 내어 놓았을 리 없다. 그러나 자기들은 지금 남의 집에 드난을 살고 있는 것이었고, 더구나 불은 때야하고 장작 팰 아범은 들어오지 않고 하였을 때, 주인 서방님이, 서투른 도끼질을 하느라, 손바닥에 생채기조차 내었던 것이 마음에 어찌나 죄스러웠던지, 그는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돌 애비는, 그러나 그러한 모든 어려움을 결코 머리 속에 두지 않았다."

from 박태원, [천변풍경],
깊은 샘, 2003년 12월, 56~57쪽

시골에서 외도를 한 남편을 두고 자신보다 먼저 경성에 올라가 남의 집 드난살이를 하는 필원이네를 쫓아 경성에 들어선 만돌 어미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자신을 찾아온 남편과 함께 광교의 한약국집 드난살이를 하는 모습 속에서 1930년대 당시 서울 중류층의 살림모습을 살필 수 잇으며, 특히 경성 한복판의 중류 가정이라도 취사에너지와 난방 에너지 모두를 여전히 땔나무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② 1930년대 중반 가회동 일대에 크게 자리를 잡게 된 도시한옥의 가치와 당대 사람들의 도시한옥에 대한 평가 등

"그러나 계집을 경영하기의 어려움은 용 서방보다 오히려 우리 민 주사가 좀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관철동 집은 난데없는 문제를 꺼내어 민 주사를 놀래 주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의 관철동 주택의, 대체 어떠한 점이 불만이었는지, 그 집을 팔아 버리고 계동 꼭대기 집장수 집에, 아주 마땅한 것이 있다고, 그리고 이사를 가고 싶다고 주장을 하여 마지않았다.
사도 좋았지만, 계집이 말하는, 방 하나와 광 한 간이 더한 그 집을 사기 위하여서는 현재의 이 집을 매간에 꼭 삼백 원씩 받고 팔 수 있다 하더라도, 돈 천원이나 또 보태야 하였고, 그 천 원이라는 돈이 사오 년 전이면 혹시 모르지만, 지금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민 주사는 한참을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from 박태원, [천변풍경],
깊은 샘, 2003년 12월, 277쪽

관철동에 첩을 두고 유유자적하면서 마작 등을 일삼고 있던 민 주사 몰래 전문학교 체육과에 다니는 젊은 남학생과의 본격적인 신접살림을 위해 민 주사가 사 준 관철동의 집을 팔고, 보다 넓은 새로운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이 마련하는 집의 명의는 아예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는 은밀한 제안에 대해 민 주사가 고민하면서 여자의 속내를 파악하는 이 대목을 통해 1930년대 중반 당시 가회동의 도시한옥이 차지하고 있던 주택으로서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두 가지 차원에서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30년대 당시 번화가였던 종로를 끼고 있었던 관철동의 보통 주택보다 집장사들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가회동의 도시한옥 집값이 거의 4배 가까운 가격대를 형성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가회동의 도시한옥이 관철동의 보편적인 주택에 비해 약간 규모가 더 컸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0.11.04 10:56

일제강점기에 경성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주도했으며, 해방 후 남로당 총책으로 활동하던 김삼룡과 지리산 빨치산의 총대장이었던 이현상 그리고 그밖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1930년대의 경성을 중심으로 벌였던 사회주의 운동과 그들의 사랑을 복원한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는 그 이념의 좌우에 앞서 식민지 운동가들의 민중적 삶의 다양한 양태를 복원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정확한 가담자만 이백 명에 이르렀고 경성재건그룹으로 외양을 바꾸면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조선인들의 삶을 그대로 복원한 이 소설은 지금은 잊혀진 과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근대도시의 노동자들에게 ‘경성 트로이카’로 불렸던 식민 치하의 사회주의 운동이 비록 소련의 붕괴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을 맞아 그 기억이 희미해지지만 여전히 청년 한국인들의 기개를 드러내고 있으며,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장안을 뒤덮을 때 경성의 한 후미진 귀퉁이에서는 농군으로 혹은 봉제공장 노동자로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잊혀진 인물들의 복원이 가지는 정신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소설에서 드러난 ‘문화주택’의 의미는 소위 ‘문화’로 불리는 용어의 등장이 강압적 근대의 한 정형으로 들어왔으며, 그 이면에는 ‘방’, ‘볕’, ‘목욕’, ‘운동’ 등 다분히 근대적인 병인론과 위생론의 의미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대문 형무소 옆의 허름한 초가집과 대비되는 높다란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서대문형무소의 외양은 곧 근대적 시선이 얼마나 강력하게 대중들에게 작용하였으며, 그 결과로 재래적인 것의 왜소함과 비루함이 얼마나 치졸한 것으로 표상되었는가를 역시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대어로서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용어가 곧 ‘문화’, ‘문화주택’인 것이다.

"일반 죄수들은 대개 수사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처음 며칠간 호되게 취조를 당하면 곧바로 형무소로 이송될 수 있었다. 그들은 높다란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서대문형무소를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모두들 하루 빨리 조사가 끝나 이 문화주택으로 넘어가기를 고대했다. 형무소로의 이송은 고문의 끝을 의미할뿐더러, 그곳은 방마다 따뜻한 볕이 드는데다가 어쩌다가 한 번씩 목욕도 할 수 있고, 가끔은 운동장에 나가 운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침내 이효정도 문화주택으로 넘어가는 날이 왔다.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차입 받은 한복을 조그만 요에 뭉쳐 오른쪽 팔에 끼고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채 자동차를 타고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도시의 서북쪽, 현저동 고개 밑에 국도를 따라 동향으로 새워진 높고 긴 붉은 벽돌 담장 맞은편에는 허름한 초가집들이 버섯 무리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총 든 군인들이 지키는 망루 아래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리고 호송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간수들이 몰려나왔다."

from 안재성, [
경성 트로이카], 사회평론, 2004년 8월, 144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0.11.03 15:52

1936년 4월 《삼천리》에 발표된 송영의 단편소설 <솜틀거리에서 나온 소식>은 식민시대 이 땅의 여성들이 어떤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졌는가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절 몇몇의 뜻있는 지식인들이 신학문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여성들을 모아 야학을 통해 사회혁신의 기제로 삼아보려는 노력이 허망하게 마무리된 채 그 끄트머리에서 여전히 야학 선생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삼고 어렵고 궁핍한 가운데서도 주변 친구들과 나라의 걱정스런 미래를 구구절절 담아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로 엮인 이 소설은 ‘김백순’이라는 이름의 스무 살 여성이 야학을 담당했다가 떠난 선생님에게 보낸 서간체의 소설이다.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하다 하여 붙여진 자그마한 집들이 모인 솜틀거리의 정겨운 동무들을 회상하고, 이제는 떠나서 더욱 보고 싶은 야학의 선생님에게 식민지 근대의 도회가 어떻게 폭력적인가를 전하고 그 속에서 세태의 변화에 그저 황망히 따를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변위를 기록한 이 소설은 1930년대 경성의 세태를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다.

궁핍한 아버지에 의해 500원에 만주의 창기로 팔려간 '순녀', 카페걸이 된 '순이', 야학을 하다가 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영업을 시작한 '점분이'와 '복순이', 고무공장에 다니는 '경란이'와 고무공장을 다니다가 제사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난이' 그리고 요릿집에서 잠을 자며 일을 하는 진고갯집의 오마니가 된 '영숙이' 등의 얘기를 풀어놓은 백순이는 당대의 관찰자로서 혹은 역사의 기록자로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송영의 소설에 묘사된 1930년대 당시 식민지 조선 그리고 일제폭압의 중심에 있던 경성의 다양한 모습은 후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다양한 실상을 그리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묘사되고 있다. 공간환경의 양극화와 근대의 소리에 따른 충격 그리고 자본의 폭력성 등을 묘사한 송영의 소설 <솜틀거리에서 나온 소식>은 따라서 1930년대 경성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동리 어귀로 들어서니까 문득 학교 생각이 끼쳤습니다. 울창한 뒷남산의 푸른 송백은 이러한 아지랑이 속에 잠여 있었습니다. 푸른 이층집 붉은 이층집 들은 이곳저곳에 우뚝우뚝 더 늘어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풍금소리도 흘러나왔습니다. 이곳에는 그전에는 은행 사택들만이 있었더니만 지금에는 다른 회사와 학교 선생 같은 부자 내지인들도 퍽 많이 와서 사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솜틀 같은 집은 산골짜기와 큰길 아래 개천 속으로 모두들 쫓겨 들어갔습니다.
선생님! 새문 밖 현저동 산꼭대기와 또 공덕리 산언덕에도 솜틀 같은 집이 꽉차서 있지요. 그러나 이 뒷남산 기슭 동리의 솜틀집들은 개천 속 골짜기 속으로 기어서 떨어져 가기만 합니다. 이 골짜기 동리에서도 그중 허술한 동리가 이 경란이 집이 있는 ‘활터구멍’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장마통에 물이 많이 쏟아져 내려오기 때문에 무너진 집들도 있었습니다. 산골짜기 양편 벽에다 조그만 터전을 호비작거려 놓고 양철 지붕과 널빤지 조각으로 앙상하게 지어놓은 솜틀집들이야말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이 앙상들 합니다. 벽, 아래턱이 쓸려 내려가는 물 때문에 허물어지는 바람에 그 위에 지어 놓았던 솜틀들은 삼분의 일이나 밑땅이 없어지고 삼분의 이만 겨우 걸려서 떨어지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주 무너질까 봐서 기다란 서까래로 바닥땅 없는 솜틀집의 한옆을 엉버텨 놓았습니다. 보기만 하여도 아슬아슬한 광경입니다. 그래도 이런 무서운 떨어질 듯한 집에서도 아이들의 울음 소리도 흘러나오고 다듬이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from 송영, <솜틀거리에서 나온 소식>, [
한국소설문학대계 12, 탈출기 외], 동아출판사, 1996년 2월(초판 2쇄), 462~463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0.11.01 22:22

일제강점기에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문화주택은 사실 비난 일색이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문화주택에 대한 대중적 비난은 1930년대 당시 경성의 인구가 40만 정도였는데 토막민의 숫자가 1만 6천에 달하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문화주택이 들어서면 주변의 땅 값이 급등하여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고 그 지역에 살던 서민들은 다시 변두리로 밀려나야만 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마치 거대한 단지형 재개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산 허리를 둘러안은 倭城臺, 旭町, 吉野町 일대에는 남촌 시민들의 부유한 근래적 저택의 빨간 지붕과 파랑 지붕이 나란히 하고 둘러졌다. 그러나 다시 시전이 길야정 이서북으로 터진 일대의 공지로 향하고..... 土窟을 가린 토막민의 수십채 움집이 언덕 위에 늘어선 이층 삼층의 산뜻한 문화주택 발 아래 깔려있다. 내리 쪼이는 석양의 斜陽이 질서없이 덮힌 함석지붕 위에서 이글이글 티오른다...... 이것이 현대가 꾸며놓은 너무나 심각하고 참담하고 「그로테스크」한 대조가 아니고 무엇이냐."

from "
아이러니도 가지가지 3-紅綠瓦의 문화주택, 토막민의 고열이 인접", <조선일보> 1930년 8월 22일 석간2(3)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0.10.20 14:33

1927년에 <조선지광>을 통해 발표된 이 소설은 낙동강의 도도한 흐름을 역사적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한국현대사의 큼직한 사건들을 열거하는 동시에 각각의 사건을 통해 계급의 분화과정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기술한 작품으로서 낙동강에서 고가잡이로 생을 영위하는 어부의 손자이자 농부의 아들인 주인공 ‘박성운’을 통해 그가 농업조수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뒤 조선을 떠나 서북간도와 남북만주 그리고 노령과 북경, 상해 등을 전전한 끝에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서울의 사회운동 단체들에 염증을 느끼고 그가 나서 자란 고향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피폐된 농촌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보다 더욱 열악한 상황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상황에서의 기거환경이자 삶의 터전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 살던 옛마을을 찾아와 볼 때에 그의 심사는 서글프기 가이 없었다. 다섯 해 전 떠날 때에는 백여호 촌이던 마을이 그동안에 인가가 엄청나게 줄었다. 그대신에 예전에는 보지도 못하던 크나큰 함석집웅이 쓰러져가는 초가집들을 멸시하고 위압하는 듯이 동두렀이 가로 길게 놓여있다. 그것은 뭇지 않어도 동척창고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중농(中農)이었던 사람은 소농(小農)으로 떨어지고, 소농이던 사람은 소작농(小作農)으로 떨어지고, 예전에 소작농이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풍지박산하여 나가게되고 어렸을 때부터 정 들던 동무들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도회로, 서북간도로, 일본으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갔었다. 대대로 살아오던 자기네 집터에는 옛날의 흔적이라도는 주추ㅅ돌 하나 볼 수 없었고(그러는 지금 창고 앞마당이 되었음으로) 다만 그 시절에 싸리문 앞에 있던 해묵은 느티나무(槐木)만이 지금도 그저 그넓은 마당 터에 홀로 우뜩 서 있을 뿐이다.’

from
조명희, <낙동강>, [낙동강], 서울, 슬기, 1987년, 14~15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