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나이2012.09.06 12:09

사오 년쯤 전부터 시내 호텔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삼십대 중반의 부부는 올해 여름 휴가를 서울시내 한복판의 프라자 호텔에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재수를 했다는 아내의 당시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고 소설 속의 나는 생일이 일러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까닭에 열아홉. 치열하게 대학 생활을 보내며 사회 참여와 운동에 열을 내던 아내와 달리 이렇다 할 사회활동이나 참여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마지 못해 시청 앞으로 나가 데모대에 끼여 들곤 하던 나는 데모가 심한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난 이후 특별한 이유 없이 붙어다니는 짝이 되었고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에 그녀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시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노심초사 그날을 기다리던 나는 추운 날씨에 약속장소에 나갔지만 그녀는 만날 수 없었다. 휴가 첫날 프라자 호텔 16층에서 밖을 내다보며 노무현을 생각한다던 그녀가 분향소가 있었던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아이스 커피를 사달라 청했고, 아내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가 다시 돌아온 나는 아이스 커피를 건네며 십수 년의 세월 저 건너편에 웅크리고 앉았던 그날의 기억을 들려주리라 마음먹는다. 

 

“스무 살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것이 택시비라고 생각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기 전까지 택시 기본요금이면 읍내 어디든 다 가는 손바닥만한 고향땅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나는, 서울에서는 술 마시다가 버스가 끊겨 택시 타고 집에 갈 때 요금이 무려 이삼만원씩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여 택시비 아끼자고 버스 첫차가 다니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보면 결국 술값이 택시비보다 더 많이 나왔다. 그래도 그건 안 아까웠다. 먹는 게 남는 거니까.”

 

from 김미월, <프라자 호텔>, [제3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파주, ㈜문학동네, 2012년 4월(초판),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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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나이2012.08.24 01:37

등단 십 년 이내의 작가들 가운데 가려 뽑아 주어지는 ‘젊은 작가상’의 2012년 수상작(제3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인 손보미의 소설 <폭우>는 두 쌍의 부부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교차 배치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이들 부부의 상황적 연관관계가 드러나는, 그리고 이들 두 쌍의 부부가 결국 치명적인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을 또 다른 관찰자를 통해 그저 암시하는 짧은 작품이다. 두 쌍의 부부가 놓인 삶의 조건과 상황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각각의 부부가 파국으로 이를 것이라는 암시의 근거는 동일하다. 결국 사랑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면 굳건하다 믿었던 신뢰와 반복적 관계의 튼실한 일상이 허약하기 그지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연으로 시작된 자그마한 사건이나 불신이 어떻게 필연적 파국으로 확장되는가를 묘사한 손보미의 <폭우>는 매우 경쾌하게 서사가 진행되는 막힘 없는 소설이지만 그 끄트머리의 느낌은 제법 육중하다. 두 쌍의 부부 중 한 편의 아내, 그녀의 나이가 서른세 살이다.

 

“가끔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때가 있었다. 서른세 살에 불과했지만 흰 머리칼이 드문드문 보였고, 볼은 축 늘어져 있었으며, 피부는 거칠었다. 밤중에 자다가 깨기도 했다.”

 

from 손보미, <폭우>, [2012 제3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파주, (주)문학동네, 2012년 4월(초판),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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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공간산책2012.03.07 19:39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 되었다는 소식에 ‘꺅’하고 반응하였다는 작가 황현진의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는 매우 독특한 성장기 소설이다. ‘이태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독특하지만 일상적인 생활세계에 던져진 태씨 가문의 26대손인 19살 태만생(太滿生)이라는 인물이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것과 전혀 그렇지 않은 것들의 파열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지만 건강하게 삶을 꾸려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서울이지만 전혀 서울답지 않은 다른 생활공간이자 세계인 이태원, 보편적이라 부르는 이성애 사이에 간혹 머리를 들이미는 동성애, 혈연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형태의 동거가족, 이민과 자살, 명품과 짝퉁, 그리고 보통의 고등학생과 공고생, 청소년 통행금지 구역과 어떠한 장애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공간 사이의 간극 등이 이 소설에서 대립하거나 연담한다. 이 속에 던져진 용화공고 3학년 학생인 ‘태만생’은 고독한 성장통을 앓지만 불량기 속에서 따듯한 인간애가 배어 있고, 씩씩한 청년의 모습으로 자주 이야기 밖으로 튀어 오르기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선언한 부모는 용화공고 3학년인 아들을 위해 그동안 살던 집을 다른 이에게 월세로 임대해주고 동네 옥탑방에 거처를 마련해준다. 할 수 없이 태만생은 이태원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삶을 모색하고 꾸려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자생적으로 맞선다. 문학동네작가상 심사를 맡았던 심사위원들의 대부분은 이 작품이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를 이루는 나이를 통과하는 주인공의 미숙하고 순진한 시선이 잘 그려졌고(소설가 한강), 도덕적으로 혼란된 환경 속에서 성장의 진통을 겪는 십대들의 풍속도로 손색이 없다는 점(문학평론가 황종연), 비극마저 희극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삶의 형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점(문학평론가 류보선) 등을 들어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문장을 따라 읽으면서 심사위원들의 이러저러한 찬사나 지적에 고스란히 동의하였지만 흥미로운 점은 실제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한 슬픈 시선도 더불어 드러났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 ‘태만생’이 알바를 위해 친구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 수상한 경계, ‘이태원’은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조선시대 효종 때 동네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비구니들만이 정진하던 절을 찾아 이들을 집단으로 윤간(輪姦)하는 바람에 그 곳 일대가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 집 원(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왜군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기 때문에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모양의 사람들을 일컬는 말 이타인(異他人)이 그대로 지명으로 굳었다는 얘기도 있다. 작가 황현진은 여기에 다시 다른 설을 보태고 있다.

“원래 이태원의 이는 다를 이(異), 태는 모양 태(態), 원은 동산 원(園).
그러니까 이태원은 일종의 고아원이었던 거지. 생긴 모양이 다른 아이들을 한데 모아 키워냈던 땅. 그 땅이 바로 이태원이다. 왜 모양이 다른 아이인가 하니, 그 아이들의 태생이 전쟁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우선 왜놈들의 전쟁이 먼저. 원래 강간은 전쟁에 있어서 하나의 전략이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쯤은 다들 알고 있을 터. 이 땅이 원래 전쟁의 나라였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 터. 결국 조선 땅 곳곳에서 배가 불러오는 여자들이 속출했지. 쪽발이 개새끼들. 폭력에 의한 성적 접촉이 난무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국의 군인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무턱대고 태어나기 시작했어. 딱히 그 생긴 모양이 평범한 사람과 다르기야 했겠느냐마는, 아무래도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이다보니 혼전순결을 강조하는 조선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테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멀쩡하게 생긴 아이들마저 이상하게스리 달라 보였을 게 뻔한 일. 결국 조선의 왕께서 그 아이들을 한데 모아 키우기로 하여 터를 닦은 데가 바로 이곳 이태원. 하필이면 이름을 이태원이라 짓고, 아이들에게 이태원의 자식들이라는 낙인을 찍었단 말이야. 참 잔인한 작명이 아닐 수 없어. 두말할 것 없이 이태원의 자식들은 최수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거지. 당연한 결과지만 아이들은 이태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 이태. 다를 이 모양 태. 그건 곧 괴물이자 싸워야 할 적이라는 뜻이었거든. 좋게 말해봤자 이방인 정도. 같혀 있으니 이태원의 아이들은 이태원 밖의 아이들이 정말로 저들과 다르게 생긴 줄로만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그러니 더욱 이태원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평생을 이 드넓은 고아원에서 살아야만 했을 거 아니겠어? 사람도 이름을 잘 지어야 하지만 땅도 마찬가지인 것을, 하필이면 이 땅의 이름을 이태원이라 짓는 바람에 저주는 한 세대에서 끝이 나질 않았더라는 말씀이야. 일본인을 아버지로 둔 불쌍한 고아들이 늙어 죽고 모조리 썩고도 남았을 무렵, 인천항을 건너 무차별 진격해온 청나라 군대가 또 이 근방의 여자들을 강간하기 시작했지. 아, 이 짱꼴라 새끼들, 용산에 진지를 치고, 불안정한 조선의 국정을 이른 바 원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말이야. 퍽킹, 짱꼴라. 암튼 원조교제급 강간을 일삼으며 결과적으로 이태원의 제2부흥기에 일조를 하게 되지. 아, 이태원의 태양은 영원하리. 아무튼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망할 을사늑약인지 을사조약인지 때문에 용산에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아주 본격적으로 주둔하는 바로 그때부터 이태원은 무법지대가 되는 비운에 처해지고 말았단 말이야. 그 이름의 저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던 것이지. 그렇게 이국의 군인 아버지를 둔 전쟁고아들은 거듭거듭 태어났어. 세월은 흘러 용산은 미군의 차지가 되고 이태원은 한때 양공주의 세상이 되었지. 아, 그땐 공주의 세상이라 그런지 이태원은 마치 왕국과도 같았다더라만 그 시절도 어느새 흘러 흘러, 자 지나가버렸고, 용산은 전쟁기념관과 미군기지로-뭐 워낙 기념할 전쟁이 많은 땅이긴 했어-그리하여 이태원은 그 이름처럼 외국인들로 넘쳐나는 땅이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 그러니까 이태원에서 조선, 즉 한국인이 비주류였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내려온 전통인 거라, 이제 여기서는 오리지널 조선놈들이 이태, 말 그대로 다르게 생긴 놈들이 되는 거고. 왜 여기를 치외법권지역이라고 부르겠어? 엄밀히 말하면 여긴 코리아가 아니야.”

from 황현진,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문학동네, 2011년 9월(초판), 119~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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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공간산책2011.02.20 19:15

무엇을 해도 심심했고 아무 것도 긍정할 수 없었으며 막연히 어디론가 가고 싶어하는 스무 살의 ‘우수련’과 전문대 교수인 아내와 사채업자인 장모로부터 정신적인 핍박을 받는 연극쟁이 ‘김해경’이 영혼의 동질성을 통해 불온한 만남을 가진 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각자의 길을 마치 여행객처럼 걸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이 전경린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이다. 소위 성장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되묻고 삶이란 결국 한 인간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퇴적층의 무늬를 만들며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한 인간을 운반하는 것이라는, 그래서 사람들의 살아감이란 여행객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스무 살의 기억과 시간이 방황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수련이 되돌아본 스무 살의 기억은 아버지의 불륜을 목도했던 때이고,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집이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는 모순을 경험한 시기였으며 허위적인 결혼 관계를 알아차린 시절인 동시에 어둠 속에서 요 위에 새겨진 단풍잎 모양의 얌전한 얼룩을 발견한 때였다. 기대했던 스무 살의 청춘은 푸른 은유가 난무하던 시기라고 믿었지만 경험으로 되돌아본 스무 살의 기억은 그저 환멸과 방황을 맛본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런 까닭에 우수련은 오래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여행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가지고 길을 거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정주(定住)하지 못하는 여행객으로 비춰진다. 스무 살의 불온한 만남의 상대였던 해경 역시 임신한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으로 나섰다가 낙선한 뒤 산으로 들어가 명상수련가가 되어 나타남으로써 피로하고 고단한 성장을 다소는 극적이라 할 수 있는 단면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무 살이 기억은 분명 푸른 은유로 되돌려진다. 푸른 은유는 곧 열정과 몽환으로 치환된다. 그러나 그런 열정과 몽환이 사라진 황폐한 일상이 곧 삶의 본질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장이라는 작가의 서술을 가만 뒤집어본다면 열정과 몽환을 지속할 때 황폐하지 않은 삶을 그려낼 수 있으며 내면의 방황을 삶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면 스무 살의 기억은 성장통 쯤으로 여겨질 법하기도 하다.

"어쩌면 그즈음 내가 가장 좋아한 건 길이었다. 유원지의 맑고 한적한 길과 대형 트럭과 버스들이 달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입사귀가 공해에 검게 찌든 간선도로들, 좁고 긴 시장길들, 오르막인 도시 언덕길, 길고 좁다란 골목길들, 변두리 어촌에서 바다로 가는 쇠똥이 퍼져 있는 뙤약볕 아래의 누런 흙길, 조개껍질들이 하얗게 띠를 두른 해변 모래길, 철길을 따라 나 있는 도시의 뒷길이나 높은 축대 위의 길, 화장터에 이르는 무덤 사이의 길, 계곡과 하천을 따라가는 길들과 시외버스에서 내려 무턱대고 걷게 되는 낯선 소읍의 단층 상점거리들‧‧‧‧‧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것은 길이었다. 그것은 공기와 같이 지불을 청구하지 않았다. 길은 강처럼 이것과 저것 사이에 나 있었고, 나는 가끔 길과 강을 혼동해 도심의 거리 한가운데서도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어느 날은 처음 지나는 동네의 좁은 언덕길에서 낯익은 노래를 듣고 귀를 바짝 기울이며 따라갔었다. <춘향가> 중의 사랑타령이었다. 창법과 목청이 할머니의 친구였던 전주 할머니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이상할 정도로 정직하고 겸손한 분별력과 꼭꼭 억누른 한과 한 생을 함께 흘러온 유장한 애가 뼛속까지 서린 목청이었다."

from 전경린,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문학동네, 2002년 10월,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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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1.02.20 18:26

생활력이 강하지만 낙천적이며 다소는 감상적인 나이 드신 엄마와 서로 배가 다르거나 씨가 다른 세 남매가 그들의 엄마를 찾아와 동거를 시작하는 풍경으로 그려진 천명관의 장편 [고령화 가족]은 한 마디로 막장가족 드라마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 따뜻한 가족소설이기도 하다.

인생의 다양한 역경을 거치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저 잘 먹는 것과 식구들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 어려운 현실적 조건으로 빚어진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자 대안이라고 믿는 엄마와 한껏 긴장을 하지만 엄마가 마련한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믿는 식구들, 길거리에서 담배 피다가 들킨 조카의 용돈을 갈취하는 삼촌, 조카의 분홍팬티를 들고 수음하는 큰삼촌과 그 사건으로 인해 가출하는 조카, 두 번의 이혼 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세 번째의 결혼을 감행하는 딸. 그리고 늘그막에 한 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불륜의 대상인 노인을 집 안으로 들여 인생의 조용한 마지막을 살아가는 엄마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녹아있는 흐믓한 가족애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우리 모두의 가족이 보이는 풍경이며 우리들의 새상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들은 그들에 비해 조금 약은 척, 혹은 가진 척 행동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한 동안 웃지만 그 웃음 뒤에 쓰린 기억이 있다.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은 신도시 외곽, 기찻길을 따라 나란히 들어선 연립주택들 가운데 하나였다. 가구 수는 모두 스물 네 가구나 됐지만 마당은 자동차 다섯 대만 들어와도 사람이 지나다니기 어려울 만큼 옹색했고 빗물 자국으로 얼룩진 건물 벽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어 집 안의 궁색한 살림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다.
건물 뒤편은 더 심각했다. 마치 밀린 임금을 못 받은 인부들이 버려두고 달아난 건물처럼 마감이 엉망이어서 울퉁불퉁한 벽에 녹슨 철근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수십 개의 가스통이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어 빌라 건물은 마치 폭발물 벨트를 온몸에 휘감고 있는 알카에다 조직원처럼 위험하고 비장해 보였다. 그렇게 지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건물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궁기와 절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from
천명관, [고령화 가족], 파주, (주)문학동네, 2010년 3월(초판 2쇄),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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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1.02.20 14:07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을 ‘비만’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비만’을 원치 않는 모순의 사회를 기발한 착상으로 고발하는 소설이 바로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이다. 제1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평자들에 의해 유쾌한 상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남근중심적이고 로고스 중심적인 사회 모럴의 허구성과 억압적 성격을 여지없이 묘사한 수상한 소설로 평가된 바 있다.

음모와 저항의 역사, 은폐된 한국의 근현대사의 단면들을 거의 예외없이 모조리 호출하는 작가의 수상한 상상력은 소위 호랑아낙의 후예라고 명명된 식모 '순애', 어린 시절에 식모가 자기 귓속에 몰래 집어넣은 쥐 때문에 환청에 시달리는 비만의 고등학생인 화자, 그리고 역시 귀에 쥐가 들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화자의 형, 실직 이후 젊었던 시절의 식모를 못 잊어 며느리를 모델로 하여 누드화를 그리거나 혹은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버지, 영재라는 이유로 집안의 모든 것으로부터 우월적인 지위를 누리는 패륜아 동생, 그리고 식모살이를 하다 주인집 아들과 결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화자의 어머니 등 이 소설은 온통 기이한 인물들의 수상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환청과 환상 그리고 환각을 넘나드는 소설 속 이야기는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펼친 수상하고 기이한, 그래서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이 작품을 심사자들은 제11회 문학동네 소설상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소설에 담긴 자유 의지와 일상에 대한 희귀한 시각 그리고 소설이 가져야 할 수상한 힘이 그리 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박진규의 소설은 수상하다. 그리고 그 수상함의 변주 속에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통찰이 있으며, 1980년대의 건설 붐은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팔십년대 중반 아버지가 한창 건축 자재 사업으로 잘 나갈 때 엄마는 기고만장했다. 우리집에 있는 고가의 수입품들은 대부분 그때 들여온 것들이었다. 엄마는 도깨비사장을 두루 다니면서 백화점으로도 들어오지 않는 식기류 따위를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지금은 유행에 뒤처져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어깨에 뽕이 들어간 팔십년대 풍의 여성용 정장도 여러 벌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서울이 온통 자기 땅이라도 되는 양 자가용을 몰고 다니며 돌아다니는 걸 즐겼다. 어쨌든 팔십년대는 이모저모로 과시의 시대였다. 그런 버릇이 남아서인지 아바지는 아직도 해질 무렵에는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노을을 바라보는 걸 즐겼다.
 
“한강 다리에서 바라본 저녁놀 죽였다. 꿈이 없는 잔챙이들이 알 턱이 없지, 그때, 서울은 태양의 도시였다.”
물론 식구들 중 그 말에 집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뮬레이션 하녀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는 식구들로부터 외면을 당해왔다.
반면에 엄마는 아직도 돈암동 구식 양옥집에서 대치동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기억한다. 이사 전날 친척이란 친척, 친구란 친구 온통 전화를 돌려 이제 구십년대에는 강 건너에 새 세상이 올 거라고 재잘대며 떠들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아주 쟁쟁댄다."


from 박진규, [수상한 식모들], 서울, 문학동네, 2005년 12월(초판),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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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공간산책2010.12.31 15:15

정이현의 장편소설 [너는 모른다]는 두 개의 사건이 중첩된 상태에서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갖게 하면서 그 첫 장을 연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신원 미상의 남자 시신 한 구와 11세 소녀의 실종 사건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사건을 시작으로 이들의 죽음 혹은 실종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가족 구성원들인 아버지, 새엄마, 전처 소생의 큰 딸과 시집와서 낳은 막내 딸 그리고 전처 소생의 아들이 견디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입장이 담담하게 소개된다. 소설의 제목처럼 이들은 '김상호'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을 중심으로 짜인 가족구성원들이긴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공유 의식이나 이해의 정도가 너무도 어설프다. 아버지이자 남편이기도 한 가장 김상호가 과연 무슨 사업을 하느라 중국에 뻔질나게 다니는지에 대해서는 가족들 모두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업으로 인해 얻어지는 물질적 혜택을 받거나 즐기는 다른 가족들, 대전 친정 어머니의 병구완을 핑계로 대만의 남자 친구를 만나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화교인 어머니 '진옥영', 새엄마와 재혼한 아버지 모두에 대한 형언하기 어려운 불만으로 집을 나가 자취를 하는 큰 딸 '은성'에 대한 다른 이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그녀의 나태한 자기 관리, 의과대학에 합격한 뒤 그저 별탈 없이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으로 믿는 아버지와 특별하게 변명할 정도의 질문도 던지지 않는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는 큰아들 '혜성', 엄마의 권유 때문에 자신이 바이올린을 좋아한다고 믿는 막내딸 '유지' 등이 그려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 결만 조금 다르달 뿐 우리들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 유지가 실종된다. 과연 아이의 실종과 한강에서 떠오른 익사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이야기는 자못 흥미를 부추기며 전개된다. 정이현의 장편 [너는 모른다]는 그래서 추리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소설의 제목에서 묻고 있는 '너'는 누구이며, 또 너는 모른다고 단정 지어 말하는 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아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래서 가족구성원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는 우리들 개개인 모두를 일컫는 것이리라. 옥영의 남자친구 '밍'의 죽음(이는 독자들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소설 속의 가족들은 결토 알지 못한다)과 막내딸 유지의 귀환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은 맨 마지막에서 약간은 허탈하게 막을 내린다. 유지의 귀환으로 인해 새로이 생겨난 가족애? 글쎄~ 좀 더 강한 어조와 주장으로 가족의 문제를 해부했어야 하지는 않을까. 수미일관(首尾一貫)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다소 아쉽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뿐만 아니라 화교 문제, 장기(臟器) 판매와 북한 주민들의 탈주, 연애와 결혼 그리고 재혼, 권력의 사칭과 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굴종적인 믿음, 이유 없는 방화, 경찰 권력에 대한 불신과 가출, 사이버 공간의 위력과 위험성 등등 현대 한국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측면의 많은 문제들이 등장하는 소설인 반면 그 끝은 유지의 귀환으로 새롭게 생겨난 가족애라…… 글쎄~ 아무튼 이 소설은 알 수 없는 주검과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는 유지의 말문 막힘으로 그 끝을 맺지만 여전히 조금은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인천역 역사 밖으로 나서자마자 정면으로 ‘차이나타운’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무엇을 본따 지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커다란 성문(城門) 조형물이 우뚝 서 있었다. 거기서부터 새로 조성된 인천 차이나타운이었다. 완만한 언덕을 오르며 밍은 오랫동안 몸에 밴 조심성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형 중국음식점들이 큰 골목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공화춘, 자금성, 북경루 같은 간판들을 천천히 지나쳤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미로를 헤매는 듯 머릿속은 론란스럽기만 한데, 발이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태어나 스무 해를 자라온 길이었다. …(중략)…
메인 스트리트를 조금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예전의 골목들이 그대로 있었다. 아니, 옳지 않은 문장이라고 밍은 생각했다. 골목들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온몸으로 증거하며 퇴락해 있었다. 꼬불꼬불 하늘을 향해 이어진 돌계단들과, 허물어져가는 담벼럭들, 폐타이어들을 얹어놓은 주황색 지붕들. 그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수없이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뛰고 걷고 노래하며 울었으며 꿈을 꾸었다.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치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주먹을 꼭 쥐곤 했다.
옛집 앞에 발을 멈췄다. 이제는 초라하다는 말로 밖에 형용할 수 없는 작은 이층집이었다. 형제들은 뿔뿔이 떠나고, 한국 여자와 살림을 차렸던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이 집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알량한 집 한 채를 놓고 형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문패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국인의 이름인 것 같았다. 2층 베란다를 올려다봤다. 덜 마른 빨래들이 바람에 너풀거렸다. 낡은 세숫수건과 검정 추리닝 사이사이에 손바닥만한 아기 내복들이 걸려 있었다."

from 정이현, 
[너는 모른다], 파주, (주)문학동네, 2009년 12월(1판 2쇄), 451~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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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0.12.24 17:07

가족의 의미와 부부라는 관계에 천착해온 작가 전혜성의 작품들에서는 ‘배반’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부 사이의 삐걱거림이 자주 묘사되곤 한다. 젊은 시절 한때 시민운동을 함께 했던 남편에 대한 환상이 모두 스러진 자리에서 아내 '숙용'은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사람 좋다고 평가하는 남편 '소기호'에 대한 염증과 그런 세평에 대한 고독으로 일상을 영위한다. 그 과정에서 아내 숙용은 자기만의 옹골찬 세상에 대해 상상하면서 그 꿈꾸기의 공간을 모델하우스로 상정하고 온 가족 나들이 장소로 모델하우스를 택한다. 모델하우스에서 아내 숙영이 읊조리는 ‘결국 마감재야. 아파트 구조야 다 거기서 거긴데’라는 표현은 곧 인간의 내적 자아보다는 일상의 외형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며, 관념의 중요성보다는 생활의 구체성을 더욱 중요한 가치로 꼽는 현대인의 새로운 태도를 의미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전혜성이 2004년에 펴낸 소설집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의 표제 소설이 된 이 작품은 여전히 일상의 불만족에서 추구되는 절제된 욕망이 한껏 분출될 수 있는 공간의 상징으로서 모델하우스를 상정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지난날에 중시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욕에 대한 분출의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생각이란, 요즘 아파트들이 고급스럽게 잘 지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분양가를 높이려고 경쟁적으로 치닫는 마감재의 사치가 오히려 집의 좋은 기운을 흐트러뜨린다는 것이었다. 집의 좋은 기운이란 뭐니 뭐니 해도 편안함이 으뜸이었다. 63평의 호사스런 꾸밈새에 주눅이 들어 그런지, 아닌게 아니라 코냑이라도 받쳐들고 우아하게 거닒직한 공간에서 소기호씨는 겉돌고 왜소해 보였다. 두 뺨이 카키색 점퍼 깃 속에 폭 빠질 만큼 홀쭉해 보일 뿐 아니라, 한 달간 술을 딱 끊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눈알아 여전히 누런데다 가느다란 핏발마저 잡혀 있었다. 물론 그에겐 기본 사양만으로도 웬만한 추가 옵션에 버금간다고 내세우는 하왕아파트 모델하우스가 하자찜 홍보실장 신세리가 읽고 재밌다고 들려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얘기만큼도 현실성이 없었다. 그 나른한 공간에서 그에게 현실적인 것이라곤 장판지를 반듯하게 말라 붙인 노오란 방바닥에 등이나 붙이고 한바탕 지지러 자고픈 욕망뿐이었다. 하지만 숙용을 생각하면 안 될 말이었다. 그녀가 이런 틈이라도 내보이기 시작한 게 얼마 만인가. 그놈의 서식 나부랭이를 면전에서 쫙쫙 찢어준 이래 이혼이니 뭐니 하는 입방정은 쑥 떨어졌지만, 아내는 확실히 전과는 무언가 달라졌다.
“어, 이건 김치냉장고네? 이런 게 다 기본 사양에 들어가네‧‧‧‧‧”
서랍식 냉장고를 쑥 뽑는 숙용 손에 뽀얀 페인트가 묻어나는 듯 했다. 소기호씨는 공연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지, 정말 속이 심하게 울렁거린 탓이었는지 뒤로 휘청 넘어갈 뻔했다.
“어, 여보, 애들 어디 갔어?”
주방 뒤 다용도실로 고개를 들이밀었던 아내가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표정. 하나로 틀어올린 머리채에서 빠져나온 잔머리가 보기 좋았다."

from 전혜성,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 
문학동네, 2004년 4월,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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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공간산책2010.12.24 16:59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졌던 소설 [마요네즈]의 작가 전혜성이 등단 이후 7년 만에 펴낸 소설집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에는 그녀의 첫 번째 장편과 유사하게 소위 인류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지속성을 보이고 있다는 ‘가족’과 ‘부부’라는 의미어를 여전히 다루고 있다. 한국적 어머니의 상(image)이 가지는 허위와 치레를 박차고 나왔던 소설이 [마요네즈]였다면 새로 세상에 내놓은 소설집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에 담긴 중단편들은 어머니와 더불어 구성되는 그밖의 다른 가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지는 관계를 낱낱이 파헤치면서 다시 한 번 가족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소설집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는 작가 전혜성이 이미 예고한 후속편의 실상이기도 하다. 여전히 가족에 대해 고통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작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헤성의 소설집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에 실린 단편 <가난한 친척>은 혈연으로 엮여 어쩔 수 없이 가족일 수밖에 없는 자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타의적으로 맺어진 자매라는 혈연적 관계가 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사위어가는 서사구조로 짜여있는 작품이다. ‘준표’라는 인물을 남편으로 두고 그와의 사이에 ‘호서’와 ‘호미’ 남매를 가진 ‘시윤’은 거역할 수 없는 혈연의 끈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는 언니의 욕구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전쟁의 참화와 가난의 고통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처럼 ‘재난은 그 첫 번째 고리에 꿰이는 게 아니다’라는 독백은, 가난은 결국 혈연의 끈을 통해 혈연관계를 맺은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며 그 전염은 다시 연쇄적으로 고통을 잉태하여 간다는 작가의 ‘가족’에 대한 의미 부여이기도 하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백만원을 가지고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언니에 집에서 가져온 모사품 게르니카를 떠올리며 죽음을 연상하는 대목은 가난이 곧 전쟁과 등가가치를 가지는 의미어이며 그 참상의 발원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의적으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것은 곧 가족의 가치에 대한 작가의 어이없음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시윤이 본 것은 ‘적막’이기 때문이다. 제각기 개별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는 탈산업사회의 현대인들에게 과연 혈연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작가의 여러 작품들은 결국 경제적인 궁핍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선하는 관계망의 유지 매개체라는 점을 확연하게 일러준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혜성의 <가난한 친척>은 매우 현실적인 작품이며, 이와 함께 보편적인 관계구조라 할 수 있는 ‘부부’의 성별 결합에 있어서도 관행적인 ‘남녀의 결합’에서 ‘남자없이 살아가는 여자’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당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귀희, 전화 요망. 02-494-2887.
아니, 언니가 재영이나 재규를 시켜 찍어보낸 메시지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애들은 전화 한 통 없는 이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음료수! 음료수!
구호를 외치는 호서, 호미의 성화에 해안에 지어진 영화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대기로 했다. 지도상이나 안내책자에 돌아볼 곳으로 추천되는 관광지이긴 했지만, 이런 어정쩡한 장소에 돈과 시간을 쓴다는 건 날씨가 웬만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렁크에 든 우산부터 꺼내려고 준표와 각각 좌우 문 밖으로 내려선 순간, 빗발은 더욱 쏴, 하고 굵어졌다. 같은 사정으로 이곳이나마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을 다른 차에서 내린 사람들도, 우산을 받치거나 점퍼를 둘러쓴 채 화급히 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만이 마구 퍼부어대는 빗줄기와 시비라도 하듯 일부러 느릿느릿 둘씩 우산을 받쳐들고 매표구 쪽으로 걸어갔다.
표를 제시하면, 차가운 금속통과대를 거쳐 1층부터 2층까지 차근차근 관람하도록 짜여진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정해진 순서 따위엔 흥미 없었다. 준표와 시윤은, 불쑥 인공적인 공간 속으로 떠밀려들어와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2층 계단 쪽으로 몰고 갔다. 깝깝한 표정의 준표는, 블루스크린 기법으로 촬영하는 디지털 사진이나 찍어주자고 했다. 호서는 깎아지른 암벽을 타는 알피니스트가 되었고, 호미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빨간 스포츠카의 드라이버가 되었다. 준표와 시윤은 아홉시 뉴스의 앵커였다. 세 장의 기념사진을 손에 쥔 순간, 그 박물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끝냈다는 기분이었다. 복도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음산했고, 탄산음료 캔을 손에 든 아이들만 피터팬을 만난 듯이 팔짝거렸다.
층계참 모서리에 설치된 청동 조각상을 사이에 두고, 부부는 어제로부터 이어진 일정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방문할 곳과 방문한 곳. 일일이 표시해두었다가 하나씩 지워나가기로 한 지도상의 동그라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대해서 나직나직 분석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건 준표의 재능이었다. 시윤은 남편의 얼굴에 마치 시황분석을 할 때와 같은 진지함이 떠오르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여행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준표는 그런 아내의 감정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from 전혜성, <가난한 친척>,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 문학동네, 2004년 4월,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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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공간산책2010.12.24 16:46

이해경이 2004년에 낸 장편 [머리에 꽃을]은 들국화의 멤버인 전인권에 대한 소설이다. 소설가 함정임의 글을 빌리자면 ‘그리하여 우리도 이제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아닌 들국화의 전인권을 신화로 한 독특한 소설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에서 80년대를 풍미한,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그 거칠음으로 회자되는 록그룹 들국화는 소설의 인물이고 사건이고 배경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6.3세대가 있고 또 386세대가 상징어로 한국사회에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들국화 세대-작가의 말을 떼어 보면 들국화 세대란 겁이 많아 물러서기를 잘하고, 정도 많아 취하면 울기도 잘하는데, 돈은 많지 않아 추위를 잘 타기도 하는. 어쩐지 흔히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세대’를 소설 속 인물로 설정한 이 소설은 다른 소설들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온몸으로 시대를 견뎌낸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흥미를 지닌 서사구조를 가지지도 않는다.

카투사로 군대 생활을 한 병장 '이상현'의 군대 이야기와 제대 후의 사회적 행적을 그린 이 소설은 그래서 서사가 그리 드라마틱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소설이 지녀야 할 많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소위 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군에 편입되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들국화 세대’ 쯤으로 구분될 수 있는 인물들의 주변을 정말 스케치하듯 그려내면서 궁극적으로 시대의 아픔과 그 언저리의 인물들을 충실하게 그려낸 소설다운 소설이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들이 어떻게 시대의 아픔을 느꼈으며 또 어떻게 살았거나 죽었거나를 거칠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소위 ‘주변인’에 대한 소설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주변인으로서의 카투사와 백색의 피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디언 사병이 등장하기도 하고, 기지촌의 주변인들과 또 그들의 주변적 생활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카투사 병장인 ‘이상현’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같은 한국인 출신의 병사인 ‘강임기’와 ‘오경택’ 등의 인물이 병치되고, 또 그들에 의해 타자화된 미군 가운데서도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치부하는 인디언 혈통의 미군사병 ‘코디어’ 등이 포진하면서 그들을 포용하는 일상의 공간 역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다.

세상에는
‘저항하다가 다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저항하지 못해 몸을 움츠린 이들’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이 꽃집 이름이기도 한 ‘머리에 꽃을’ 찾거나 아니면 들국화의 전인권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딴 카페 ‘전인권’에 무시로 출입하는 것은 그 형태가 어찌되었건 모두 시대의 저항인 것이다. 무언가 표출해야 하는 젊음과 청춘을 그 반대 의미를 상징하는 음울한 공간이나 음지 혹은 창마저 막혀버린 하숙방으로 몰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저항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80년대를 보내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코디어는 다시 내 방 문을 두드렸다. 한국군의 점호에 해당하는 ‘포메이션’이 있기 직전이었다. 나는 오믈렛과 커피 한 잔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올라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FM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팝송을 듣고 있었다. Morning has broken......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캠프의 아침은 한가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던 W읍, 한국전쟁의 최고의 격전지였던 N강 유역에 자리잡은 캠프 캐롤, 4번 게이트를 지나 오하이오 에버뉴로 접어들면 왼편에 영화관, 그 옆에 내가 기숙하는 길다란 막사 건물,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를 굴러가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 그 육중함으로 보아 거대한 트레일러,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코끼리의 한가로움‧‧‧‧‧
비가 오면 ‘투 마일즈 런’이 생략되므로 실제로 한가로운 아침이기도 했다. 새로 부임한 웨스트 포인트 출신의 중대장은 달리기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2마일을 다 달리고도 걸핏하면 게이트를 벗어나 2마일쯤을 더 달리곤 했다. 체력좋은 지아이들도 게이트가 가까워지면, 오늘은 제발‧‧‧‧‧ 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나는, 중대장 혼자 게이트를 빠져나가 한참을 달리다가 뒤돌아보니 부하들이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더라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상상하며, 새벽의 기지촌 거리를 달리곤 했다. 일찍 잠에서 깬 주민들이 문 틈으로 기웃거리면, 나는 지쳐보이지 않으려고 악으로 깡으로 남북전쟁 시절의 군가를 복창했다. 미시시피강 언덕엔 물안개가 자욱하네‧‧‧‧‧ March and march again‧‧‧‧‧"

from 이해경, [머리에 꽃을], 
문학동네, 2004년 6월, 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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