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취와 기억'2016.06.07 10:45
소설_한국주거사2015.03.24 14:02

1946년에 발표된 계용묵의 단편 별을 헨다는 해방 직후 남과 북 모두에서 생활터전을 상실한 소위 뿌리 뽑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난민의식으로 불리는 장소의 상실과 삶의 부박함은 해방 공간의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계용묵의 시선에 옹골차게 포착되었다. 북이나 남이나 상황은 다르지 않아 남에서는 북으로, 북에서는 남으로 살 길을 찾아 움직이는 상황에서 남쪽은 해방이 되어 서로가 먼저 집을 차지하고 재산을 모으려는 모리배들이 활개를 치고, 법과 정의가 아니라 혼란 속의 폭력에 세상을 지배하던 풍경이기도 하다. 소설 속 화자는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만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제 땅에 묻으리라는 희망으로 귀국하지만 간신히 얻어 든 집에서 수속을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아홉 달이나 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귀국선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 적산가옥의 한 모퉁이를 점거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제 뜻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삼십 년의 세월이라는 소시민적 지식인으로서의 의지로 인해 그 짓을 차마 하지 못한다. 그가 그린 1946년의 서울 풍경이 별을 헨다에 온전하게 묘사된다.

 

같은 소설에는 당시 '문화주택'의 표정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온갖 폭력으로 모리배 역할을 하던 친구가 적산가옥을 무단 점유하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소설 속 화자와 만나 점심을 먹고 손목을 잡아 끌어 살피게 된 풍경이며 자리다. "점심이람보다 술이었다. 실로 얼마 만에 소고기찜을 실컷 먹고 확확 다는 얼굴을 느끼며 남산 밑을 돌아 후암동(厚岩洞)으로 따라간다. 어느 커다란 회사의 중역이 살던 숙사인 듯 반 양식의 빨간 기와집이다."라는 묘사가 그것이다.

 

진고개 너머 어떤 일본집에 수속 없이 제집처럼 들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정식 수속을 밟아 내어쫓고 들어가게 해준다고 부티 오늘 오정 안으로 만나자는 친구가 있다. 집이 없어 한지에서 겨울을 날 생각을 하면 마음이 으슬하다가도 그러니 있는 사람은 내어쫓고 들다니 생각을 하면 내어쫓긴 사람이 역시 자기와 같은 운명에 놓여질 것이 아니 근심일 수 없다. 자기도 처음 서울에 짐을 푼 것은 한지가 아니었다. 푸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일본집 다다미방 한 칸이 베풀어지는 호의를 힘입어 겨울을 나게 되었음은 다행이었다 할까. 해춘(解春)도 채 못 미쳐 수속이 없다 나가라 하여 쫓겨난 이후로 이래 아홉 달을 한지에서 산다. 남을 한지로 몰아내고 그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눈을 감을 염치가 없다. 이런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비로소 듣는 이야기가 아니요 받아보는 호의가 아니다.”

 

계용묵, 별을 헨다,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_02 해방과 전쟁, 파주, ()문학동네, 2015.1(초판), 100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한국주택백과2013.12.10 21:52

모던 걸의 연애와 문화

지금은 촌티가 줄줄 흐른다는 이유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입 밖으로 내놓기에 여간 쑥스러운 말이 아닌 연애(戀愛)’라는 명사가 이 땅에 처음 등장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0년경이다. 물론 자유연애를 줄여 부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거쳐 식민지였던 당시 한반도에 출몰한 신조어였다.

 

이 말이 날개를 달고 퍼지기 전에는 청춘남녀가 바짝 붙어 거리를 활보할라치면 남자는 부랑아요, 여성은 탕녀로 불릴 정도로 조선은 엄숙한 나라였지만 소위 신문물과 신식교육의 세례를 받은 청춘남녀가 신인류로 등장하면서 그들을 일컫는 모던 보이모던 걸의 자유연애 행각은 어르신들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춘남녀들의 부러움을 사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애와 더불어 문화라는 구호를 줄기차게 외쳐대기 시작했고, ‘자유연애와 더불어 문화주택은 이들이 욕망하는 새로운 생활이자 주택으로 각광을 받았다.

 

지금은 벌써 80여 년이 흐른 그 시절의 실렸던 만문만화(漫文漫畵) 한 편을 살펴보자.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는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한 뒤 귀국하여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다 동아일보를 거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가상소견’, ‘못된 유행’, ‘11등의 만문만화를 연재했는데 1930112일자 만문만화는 매우 흥미로운 세태 비판으로 읽힌다.

 

19301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 여성선전시대가 오면조선일보

 

만문만화의 내용은 1930년대에 들어서며 신여성들의 노출이 심해진 세태를 꾸짖는 것이다. 한복 대신 양장을 택한 모던 걸들의 짧은 치마 밖으로 드러난 다리가 사나이들의 눈길을 끌지만 속물적인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여성들의 육체가 상품화되는 상황을 개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 여성들의 다리에 써 넣은 문장들인데, 전차의 끄트머리 좌석쯤에 앉은 여성의 다리에는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 피아노 한 채만 사 주면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돈과 재물, 그리고 서구에 대한 선망이라는 당시의 대중적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주택이란 것이 소위 서양풍의 주택을 말하는 것이어서 서구문화에 대한 쏠림현상이 심했다는 것이니 이를 누릴 수 있는 부류는 새롭게 자리한 전문직업인이거나 혹은 먹고 살 것이 제법 마련된 일부 상류층에 허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1935년에 발표된 유진오의 소설 <김강사와 T교수>는 시간강사인 나약한 지식인 김만필과 교활하고 세속적인 T교수를 등장시킨 일제강점기의 작품인데, 이 소설에도 문화주택이 등장한다. 당연히 모던 보이였던 T교수의 집이 문화주택이다.

 

“T교수는 이곳서도 단골손님인 듯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고 하며 술을 먹었다. 두 사람이 오뎅집을 나왔을 때에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이번에는 김만필도 상당히 취했으나 정신은 도리어 똑똑했다. 삼월백화점 앞에 와서 T교수는 단장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김만필이 사양하니까, 전차도 끊어졌는데 걸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집에 갈려면 어차피 자네 집 앞을 지나니까 같이 타자고 억지로 태웠다. ‘우리집을 아십니까?’ 김만필은 자동차가 움직이자 물었다. T교수의 훌륭한 문화주택이 김강사의 하숙 근처에 있는 것은 자기도 잘 알고 있었지만 뒷골목 속 더러운 그의 하숙을 T교수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또 다른 만문만화를 하나 더 보자. 1930414일자 같은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일일일화(一日一畵)’라는 연재물로 소개된 이 만문만화 역시 안석주가 쓰고 그린 것인데, 제목이 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제목으로만 뜻을 살피자면 당시 유행하는 문화주택이라는 것이 대부분 빚을 지고 얻는 것이어서 그곳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며칠 살지도 못하는 모기와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허식과 치레 그리고 은행자본의 농간을 꿰뚫고 있는 시선인 것이다.

 

193041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 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 조선일보

 

요사이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데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거뜬하게 짓고서 스위트홈을 삼게 된다. 그러나 지은 지도 몇 달 못 되어 은행에 문 돈은 문 돈대로 날아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뿐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文化住宅)이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대부(貸付)라고 쓰인 긴 쇠사슬로 은행이 집을 옭아매고 있고 풍경은 유행과 허례를 좇아 문화주택을 취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사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등장한 하우스 푸어에 다름 아니다.

 

문화주택과 경성의 토막민

19311128<조선일보>의 만문만화는 ‘1931년이 오면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문화주택은 1930년에 와서 심하였는데 호랑이 담배 먹을 시절에 어찌 하야 재산푼어치나 뭉뚱그린 제 어미 덕에 구미의 대학 방청석 한 귀퉁이에 앉아서 졸다가 온 친구와 일본 긴자에 갔다 온 친구들과 혹은 A, B, C나 겨우 알아볼 정도인 아가씨와 결혼만 하면 문화주택! 문화주택하고 떠든다. 문화주택은 돈 많이 처들이고 서양 외양간 같이 지어도 이층집이면 좋아하는 축이 있다. 높은 집만 문화주택으로 안다면 높다란 나무 위에 원시주택을 지여놓은 후에 스위트 홈을 베푸시고, 새똥을 곱다랗게 쌀는지도 모르지.”

 

우리말 쓰기에 맞춰 인용한 만문만화의 내용을 곱씹자면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계층은 부모덕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거나 외국에 한 때 기거했던 사람들이며, 소위 신여성과 결혼하려면 남성은 문화주택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게다가 문화주택 여부의 판단은 주택의 외양과 내부는 물론이려니와 2층이라는 조건이 상당히 중요한 판단기준이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삶을 의탁한 사람들이 바로 스위트 홈이라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축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서양풍의 느낌이 강한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불렀다는 기사와 함께 소개한 서양식 주택 近代日本住宅史

 

문화주택이라는 용어는 1922년 일본의 평화기념 동경박람회에서 14채의 주택이 실물로 전시되면서(문화촌)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뒤 그대로 식민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인데 과학적 생활의 보장을 위한 일광과 통풍 등을 위해 유리창이 많았으며, 미백주의의 강조로 빚어진 순백의 커튼과 서양풍 입식생활을 보장하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신문물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와 축음기 등과 같은 근대적 이기물이 놓인 거실 등을 갖춘 집으로 표상되었다.

 

안석주의 만문만화에서 보듯이 한반도로 유입된 문화주택은 일제에 기생한 특권층이거나 고급관리 혹은 경제계층으로 본다면 상류에 속하는 부류가 향유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조선은 부의 편중이 심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제에 빌붙은 사람들이 문화주택을 향유할 수 있는 재력과 특권을 가졌던 바, 일반 대중들은 이들을 얼치기 서구문화 예찬론자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문화주택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주택은 모든 이들에게는 동경과 욕망의 구체적 대상이었다. 1930년대에 발간된 <신여성>, <신가정>, <여성> 등 여성잡지에서 문화주택을 방문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가정탐방기’, ‘가정태평기’, ‘당대여인생활탐방기’, ‘명사가정부엌참관기등이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19379월호 잡지 朝光(조광)에는 음악가 계정식이 실제 지은 집이 묘사된다. 1936년에 신축한 이 집은 72평의 대지에 18칸의 공간으로 구성된 방 3개짜리 문화주택이었다. 방들 사이로 복도가 지나고 집안에 부엌과 목욕실이 있지만 부엌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없도록 집 뒤편에 두었으며 장독대와 김치를 저장하기 위한 지하실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를 소개한 기사를 살펴보자.

 

서대문 밖 연희장(延禧莊) 문 주택지 중에도 가장 아담한 곳! ... 남향한 문화주택 전면은 모두 분합을 드리고 유리창을 하여 창만 열어젖히면 바람과 일광이 맘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부엌은 뒤로 붙여서 보이지 않고 방 만이 순백의 커튼 아래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뜰 앞 정원에는 조그마한 밭이 있어서 이집 주인들이 좋아하는 온갖 물건을 심어놓았다.오른쪽(右便) 방은 계씨의 방, 그 다음이 부인의 방이요 그 다음이 시어머니 방인데 가운데로 복도가 있고 뒤로는 부엌과 목욕실과 지하실이 있다. 그리고 시멘트로 장독대를 만들고 장독대 밑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이 지하실은 김치광이라고 부인은 설명해 주신다. 이 집은 작년에 건축한 집으로 도합 4천원을 들여서 신축하였다고 한다.”

 

문화주택에 대한 대중적 비난은 1930년대 당시 경성의 인구가 40만 정도인데 흙이나 움막으로 비바람을 가린 토막민(土幕民)의 숫자가 16천에 달하는 상황에서 문화주택이 들어서면 주변의 땅 값이 급등하여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고 그 지역에 살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다시 변두리로 밀려나야만 했다는 사실에서도 수긍이 간다. 이러한 상황을 빌어 그로테스크한 대조라 언급한 신문기사도 등장한다. 1930822<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아이러니도 가지가지 3-紅綠瓦(붉고 푸른 기와)의 문화주택, 토막민의 고열이 인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이다,

 

남산 허리를 둘러 안은 왜성대와 욱정(倭城臺旭町, 지금의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 길야정(吉野町, 지금의 중구 도동) 일대에는 남촌 시민들의 부유한 근래적 저택의 빨간 지붕과 파랑 지붕이 나란히 하고 둘러졌다. 그러나 다시 시전이 길야정 이서북으로 터진 일대의 공지로 향하고.土窟(토굴)을 가린 토막민의 수십 채 움집이 언덕 위에 늘어선 이층 삼층의 산뜻한 문화주택 발아래 깔려있다. 내리 쪼이는 석양의 斜陽(사양)이 질서 없이 덮인 함석지붕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른다.이것이 현대가 꾸며놓은 너무나 심각하고 참담하고 그로테스크한 대조가 아니고 무엇이냐.”

 

문화촌과 문화아파트

문화주택과 식민지 백성의 빈민굴이 공존하는 상황은 당시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자 풍경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문화주택은 다른 주택과 그 양식이나 내용이 다른 전형으로서의 주택이 아니라 결국 지식인층의 기호품이거나 권력자 혹은 부호들의 장신구쯤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57년 김용환 화백이 그린 즐거운 문화촌대한주택공사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친 이후에도 문화주택은 대중들의 이상향이었다. 대한주택공사가 분양한 단독주택지에는 문화촌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할부로 구입할 수 있는 아파트단지 분양광고물에도 문화촌이 내걸렸다. 뿐만 아니다. 1963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8개월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손창섭의 장편소설 [인간교실]에서도 문화주택은 여전히 건재한 채 등장한다.

문화촌아파트 분양광고물 대한주택공사

 

주인갑 씨가 자기 집 옆방을 세놓기 시작한 것은 6.10 화폐개혁 이후부터의 일이다. 자유당 시절에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했던 비닐 중심의 무역업이 들어가 맞아서 돈이 좀 돌 때, 손수 설계도 하고 꽤 공들여 지은 집이다. 한강이 눈 아래 굽어보이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숲이 우거지는 속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70평 남짓한 대지에 빨간 벽돌로 벽을 두껍게 쌓아올리고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얹은 25평짜리의 제법 아담한 문화주택인 것이다.... 한강 인도교 부근이나 노량진 쪽에서도 단박 눈에 확 띄도록 새뜻하고 이채로운 외풍을 갖추어야 한다면서 굳이 선혈색 빨간 벽돌 벽에 일부러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주문해다가 지붕을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현관 양쪽에 하얀 돌기둥을 세우고, 멋진 베란다를 만들고, 문틀에는 돌아가며 눈이 부시도록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창문마다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커튼을 드리우게 했던 것이다.”

 

문화를 말하며 문명을 지시하는 일

문화란 일본인들이 독일어인 쿨투어(Kultur)를 번역해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에서 사용한 말이기도 하다. , 형벌이나 위력을 사용하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 문치교화(文治敎化)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번역한 문화가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의미를 말한다면 중국에서의 문화는 ()에 대립하는 ()‘으로 무력이나 형벌의 반대편에 서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가 문화에 녹아있는 셈이지만 주택과 결합하면서는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주택이라는 뜻을 강하게 풍겼다. ’문화주택이나 문화촌이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문화생활이란 단어를 심심치 않게 내뱉는 이유다.

 

, 문명은 물질이고, 문화는 정신인 까닭에 문화란 문명보다는 고차원의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채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정신의 기초를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 둔다면 그 앞날은 지극히 불투명하고, 푯대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법 많은 관객을 불러보았던 <말하는 건축가>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건축가 정기용의 생생한 말이 담겨 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답도 이 땅에 있다는 것이니 문화융성의 시대라는 구호에 앞서 마음에 두고 곱씹어야 할 말이다. ‘문화를 말하며 문명을 지시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끝.

 

이 글은 야나부 아키라가 짓고 박양신이 옮긴 한 단어 사전, 문화(푸른역사), 권보드래 지음,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대한주택공사에서 발간한 대한주택공사 이십년사, 대한주택공사 삽십년사등을 참고하였다.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책_을 읽다가2013.05.20 16:39

일본 삼성당에서 기획, 출판한 <한 단어 사전> 20권 가운데 한 권인 이 책은 일본에서 현재 사용하는 '문화'라는 단어가 다이쇼 시기에 독일어 쿨투어 Kultur의 번역어로서 성립했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문화'라는 단어가 존재했었고, 그 연원은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문치교화의 정치이념이었음을 밝히면서 문화라는 단어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마침 그 단어는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 역시 모호하거나 애매한 의미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살필 자료라 판단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익숙한 '문화주택'이나 '문화생활'의 의미도 따져 볼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기도 하다. 

 

문화라는 말은 다이쇼 시기 저널리즘이나 정치가에서 문화생활, ’문화학원, ’문화냄비, ’문화만주(饅頭) 등 일반 민중의 생활 속으로도 전파되어 간다. 여기서는 그중 하나인 문화주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건축학자인 니시야마 우조(西山卬三/1911~1994)<일본의 주거>(勁草書房, 1976)에 따르면 1920년에 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기념하는 박람회가 도쿄에서 열렸을 때 건축업자들이 모델하우스를 늘어세우고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빨간 기와, 유리창, 흰 커튼 등 서양풍을 도입한 일식·양식 절충의 집은 큰 인기를 끌어 문화주택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왜 문화였을까.

 

건축학회에서도 같은 해 건축과 문화생활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고 있다. 그 내용이 <건축잡지>(416, 19216)에 게재되어 있는데, 개회사에서 학회 회장인 도쿄제국대학 명예교수 나카무라 다스타로(中村達太郞/1860~194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테마를 건축과 생활개선으로 할 예정이었지만 건축과 문화생활로 바꿨다. “문화주의에 의거해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문화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예전 적국이었던 독일에 대해서도 학술상 우리는 경모하고 있습니다. 역시 독일의 문화가 세계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이 강연회에서는 건축학자들 뿐만 아니라 도쿄 시장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857~1929), 정치학자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 등도 강연을 했는데, 니시야마 우조가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하고 있듯이 거의 모든 사람이 문화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문화를 왜 정면에 내걸었을까. 그 사정은 일본의 번역어 일반에 해당되는 현상으로 왠지 고급스런 어감이나 효과 때문인데, 이것을 의식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회장인 나카무라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듯이 역시 독일의 문화가 세계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주택은 당시의 중류, 인텔리 계급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양관(洋館)이라는 것은 한 시대 전인 메이지 시기에서 이른 바 상류계급의 주거인 반면에, ‘문화주택이라는 것은 양관보다는 좀 작지만 응접실과 넓은 거실, 독방을 갖추고 있어 가장(家長)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생활도 중시하는 서양풍의 근대적인 주거이다. 이 주택은 시대의 풍조를 타고 도쿄에서 오사카(大阪), 고베(神戶)로 확산되고, 이윽고 일본의 전 도시로 보급되어 갔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아파트먼트 하우스가 활발하게 건설되자 그 영향을 받아 모리모토 고키치(森本厚吉/1877~1950)1922년에 아파트 건축을 추진하는 문화보급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1925년에 간다(神田) 오차노미즈()에 서양풍의 문화 아파트먼트가 건설되었다. 미국에서 건너 온 문화였지만 역시 문화로 불리고 있다. 아파트가 당시의 서민들에게는 약간 사치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이후 주택의 수요에 부응해 많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2차 세계대전 후 패전으로 가난해진 일본에서 도시의 건축은 아파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을 오사카·고베 지구에서는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전쟁 전의 호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지만 경제 성장과 더불어 아파트는 그 가치가 급속히 떨어져 저소득자용 주택으로 전락해 갔다. 그러다가 아파트문화의 호칭이 분화되어 아파트는 설비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집합주거로 기친(木賃) 아파트로도 불리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분카(ブンカ)’라고도 쓰이며 집집마다 화장실과 부엌이 있는 한 단계 위의 아파트를 지칭하게 되었다.

 

from 야나부 아키라(柳父章) 지음, 박양신 옮김, [한 단어 사전, 문화], 서울, 푸른역사, 20134(초판 1), 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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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소설_한국주거사2013.01.09 15:13

1963422일부터 1964110일까지 약 8개월에 걸쳐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손창섭의 장편소설 [인간교실]은 자유당 말기 비밀산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주인갑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1960년대의 한국 사회를 만화경으로 들여다본 작품이다. 따라서 일견 세태소설로 불리기도 하지만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방민호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연구가치가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 이 작품은 제3공화국의 등장에 버팀목이 되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의 기록인 동시에 도회지의 반대편에 선 농촌과 이를 동경하는 도회인들의 귀농의식을 탐색할 수 있는 사회적 지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유당 말기 사업에 실패한 뒤 혁신정당에 가입하였다가 5.16 쿠데타로 된서리를 맞은 실직자 주인갑을 중심으로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남혜경여사와 전처 소생의 딸로서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광숙 그리고 보순이라는 이름의 식모아이가 흑석동의 문화주택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식구도 많지 않고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흑석동의 살림집 방 한 칸에 세를 들이기로 한 주인갑 내외는 황진옥이라는 여인이 연하의 남성 김두형과 함께 입주하게 되고, 이렇게 들어온 황여인에게서 자신의 전처가 가졌던 용모와 마음씨를 대번에 알아차려 마음에 연모의 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황여인이 자신의 아내인 남혜경과 동성애를 하는가 하면 자신을 학대했던 남편의 아랫사람이었던 김두형과 동반으로 가출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집을 떠난다. 다시 세입자로 들인 윤명주와 조선영이라는 이름의 여대생 가운데 윤명주는 학교를 그만 두고 댄스홀에 드나들면서 뭇 남성들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이들과 함께 나타난 안동철이라는 청년의 가세로 윤명주를 찾는 명사들을 상대로 윤명주와 지내는 모습을 몰래 카메라로 찍어 그들을 겁박한 뒤 그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삼정학원이라는 공익재단을 만든다는 엉뚱한 계획에 아내 남혜경과 자신이 우연히 가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결국 주인갑으로 하여금 자신의 흑석동 집을 팔고 안정된 생업과 심신의 휴식을 위해 귀농을 결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내와는 성격 부조화와 황여인에 대한 연민으로 인한 애정 문제에 고민을 거듭하던 주인갑은 결국 안두형에게 몸을 버린 식모아이 보순이와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전처 소생의 딸 광숙과 함께 집을 떠나며 자신을 만나기를 꺼리는 황여인과의 후일 기약을 믿고 기차를 타고 김두형이 먼저 자리잡은 농촌으로 새로움을 향해 떠난다. 이러한 이야기의 시말은 흑석동의 문화주택에서 시작되며,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1960년대까지 지속된 문화주택의 여러 가지 측면을 사실로 확인하게 된다.

 

소설 속의 문화주택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본동 ×××번지로 기술되어 있지만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해설에 의하면 이 소설은 분명 작가 손창섭의 실제 자택을 배경으로 했을 것이며(같은 책의 473해설’), 평론가의 조사에 따르면 손창섭은 흑석동 효사정(孝思亭)과 원불교 서울 회관 사이의 언덕 쯤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설속 문화주택의 위치는 구체적으로는 소설 속 본동과는 다른 흑석동이었을 것이다.

 

주인갑씨가 자기 집 옆방을 세놓기 시작한 것은 6.10 화폐개혁 이후부터의 일이다. 자유당 시절에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했던 비닐 중심의 무역업이 들어가 맞아서 돈이 좀 돌 때, 손수 설계도 하고 꽤 공들여 지은 집이다. 한강이 눈 아래 굽어보이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숲이 우거지는 속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70평 남짓한 대지에 빨간 벽돌로 벽을 두껍게 쌓아올리고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얹은 25평짜리의 제법 아담한 문화주택인 것이다.”

 

손창섭, [인간교실], 서울, 예옥, 20089(초판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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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1.11.22 15:50

소설의 얼개로부터 글로 만들어지기까지 18년이나 걸렸다고 알려진 이문열의 장편 [리투아니아 여인]은 이미 2010년부터 2011년 사이에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설의 중심 인물 김혜련을 놓고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층위적 문제를 드러낸 이 소설은 흔히 분류하듯 가족소설이라 하기에는 그 끝이 날카롭고 예술가의 생을 그린 소설이라 하기에는 그 예술적 깊이를 드러냄이 깊지 않은 탓에 규정하기 곤란하고 연애소설이라 부르기에도 쉽지 않은 다양한 구별짓기의 끄트머리 모두를 교집합으로 삼는 소설이라 부를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될 무엇이 있다면 고독한 예술가들의 유목적 삶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 애써 말할 수는 있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소설의 중심 인물인 김혜련에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소설 속 화자를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김혜련보다는 소설 속 화자 ‘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에 작품의 무게가 더 느껴지기 때문이며, 그래야 이문열다운 글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산’과 ‘식민’의 역사 속에 내팽개쳐진 인물 김혜련은 사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며 경계가 허물어진 흐트러진 세상살이에 대한 작가의 외침으로 읽히기도 한다. 독자 모두에게 이미 변한 세상에서 각자 몸 안을 도는 피와 발을 딛고 선 땅과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적 일치감과 순응적인 문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때론 연민과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론 당혹감에서 감상의 발현을 억제할 수밖에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소설 속 화자와 소설의 중심 인물 김혜련이 처음 조우한 1960년대 부산의 어느 주거지에는 당시 부동산 업자들의 초기 상품으로 짐작되는 문화주택의 거친 풍경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두 번째 골목 끝 넓지 않은 공텃가에 있는 집 한 채가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그 앞을 지나는 내 주의를 끌었다. 그 부근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1960년대 식 문화 가옥 같은 집으로 정면에서 눈에 띄는 것만 붉은 벽돌을 무슨 귀한 장식처럼 덧씌운 시멘트 블록 집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담장에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돌지 않았는지, 담장은 그저 외겹 블록으로 키 큰 어른의 어깨 높이 정도로 쌓은 뒤 그 위에 가시철망을 두어 줄 어설프게 돌려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문께에 이르면 갑자기 굵은 기둥을 세운 뒤 요란한 원색으로 도색한 철판 대문을 달아 붉은 벽돌을 덮은 현관 기둥과 어울리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겨우 전쟁의 참화를 털고 약간의 여유를 찾아 내 집 마련을 나선 사람들을 겨냥한 도시 부동산 업자들의 초기 상품이라 상상하면 대강 짐작은 될 것이다."

이문열, [리투아니아 여인], 서울, 민음사, 2011.11(1판1쇄),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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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0.12.29 13:57

1971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최인호의 단편 <미개인>은 최인호의 작품 가운데 <무서운 複數>와 더불어 가장 긍정적이자 본격 문학의 진수로 평단에서 회자되는 작품이다. 1972년에 최인호론을 처음으로 언급한 김치수에 따르면, <미개인>은 최인호 문학의 가능성을 보유한 작품으로서 역사에 대한 애정을 잘 그려낸 작품으로 언급된 바 있다. 최인호의 다른 작품들이 상업주의적 성향을 보인다거나 혹은 퇴폐주의적 시각에 경도되어 있다는 다른 시각과는 달리 이 소설은 본격적인 문학작품으로 구분되는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문학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믿음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거나 혹은 문학의 대 사회적 발언을 적절하게 담고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까부수고 뭉개는 관성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시절’에 목발을 짚은 스물 여덟의 '최선생'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학교 근동의 건설 관행에 바람이 든 동리사람들과 마주하는 경험을 그린 이 작품은 건설과 그 결과가 가져올 개발이라는 돈의 축적을 향한 맹목적인 파괴와 허영의 그림자 때문에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는 지고의 도덕과 재래적 가치관의 와해 문제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는 작품이다. 소위 문둥병 음성환자들과 자신의 자식들이 학교하는 생활공간을 함께 쓰는 것은 문화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동리 사람들에 맞서는 청년 최선생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저주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고, 돈과 그 돈의 광기에 눈먼 사람들이 외쳐대는 문화는 곧 ‘개 백정 문화’와 다름 아니라는 소리없는 외침을 강남개발을 통해 처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월남에서 돌아와 제대했을 때 나는 왼쪽 다리의 중요부분을 잃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 여덟 살 젊은 나이에 신체가 부자유스럽게 되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물론 나는 얼마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제대한 후에 나는 최초로 서울 변두리 교외의 자그마한 국민학교로 부임을 받았다. 나는 사범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임장을 들고서도 그 국민학교가 어디에 있는가를 얼핏 알아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부임한 곳은 한참 뻗어가는 남서울 근처의 어디쯤으로 최근에야 비로소 서울시에 편입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약간의 짐을 챙겨들고 부임지로 갔었다. S동, S동에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한마디로 요란스런 동리였다. 언제나 땅은 질퍽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생선 장수처럼 장화를 신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편으로 부르도저가 왕왕거리며 산턱을 깎아내리면서 단지를 조성하고 있었고, 그런가 하면 한쪽에선 농촌 특유의 분뇨 냄새가 풍겨지고 있는 거리였다. 거리 양 옆엔 간이막사 같은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그곳엔 비꺽이는 의자가 있는 다방이 있기도 했고, 석유를 파는 노점이 있는가 하면, 유난히 정결한 느낌을 주는 주유소가 서 있기도 했고, 여관과 터키탕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 건물 옆엔 아직 이장이 끝나지 않은 때문인가 묘지들이 드문드문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매우 엄중한 문구로 몇 월 몇 일까지 연고자가 없어 이장되지 않는 묘지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경고판을 보았다. 그 경고판은 산비탈 길에 우뚝 서서 위엄을 떨치고 있었다. 거리 옆으로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시원하고 넓은 고속도로 위로 매끈한 차들이 씽씽이며 대전으로 부산으로 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땅값이 뛰고 있었다. 유난히 질퍽거리다가 유난히 먼지가 피어오르는 거리로, 납작한 세단들이 소달구지를 피해가면서 이곳에 거의 매일이다시피 와서 쑥덕이는 흥정을 하고는 사라져 버리곤 했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뛰어 오르는 땅값에 반쯤 혼이 나가서 앞니 빠진 유아 같은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제까지의 밭을 갈지 않고, 그곳에 대신 벽돌 공장을 세우거나 그것도 아니면 복덕방으로 전업을 해버리고 말았다. 처음에 그들은 혹 다음날이면 이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땅값이 수그러들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얼마만큼씩 땅을 처분했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그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돈이, 재산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버스의 노선은 연장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로운 소형 문화주택이 밭 가운데 서기 시작했다. 거리 거리엔 살아간다는 사실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확신이나 하는 듯한 시끄러운 동요가, 아우성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 추세로 보면 그들은 신흥 재벌이 될 판이었다."

from 최인호, <미개인>, [
나남문학선 15 : 최인호 다시 만날 때까지], 나남, 1995년 4월,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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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0.12.13 14:56

산업화가 인간을 어떻게 기계화하는가의 메카니즘을 집중적으로 고발하고 대중사회를 비판한 대표적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김동립의 <대중관리>이다. 즉, 전산업시대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원했다고는 할 수 없는 산업화 과정과 이를 작동시키는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이 가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어떻게 파멸의 길에 이르게 되는가를 보인 수작이라 할 수 있다. 권모술수를 통해 자리를 차지한 뒤 온갖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속물적인 '이계장'과 이 인물을 둘러싼 주변적 인물들을 통해 현대문명의 몰개성적 생활과 몰가치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는 김동립의 작품 <대중관리>에서 주인공 이계장은 정신과 의사의 권고와 치유 덕분에 새로운 삶을 찾겠다는 의지를 발현시킨다.

속물적인 인간으로부터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 장면은 인간철학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키는 대목인 동시에 부품화된 인간으로부터 본연의 자아를 모색하는 전환점이 된다. 이계장의 처남인 '창수'는 이와 달리 처음부터 관리부장의 철저함에 안도당한 채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가 된다. 이는 창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보편적인 대응행태라 할 수 있으며, 기계와 관리와 효율이 지배하는 현대 문명사회의 부조리가 인간의 본연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점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는 창수에게 업무의 철저함을 주입시키려 했던 관리부장 역시 정신병원을 찾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한 것이며, 창수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욕구를 분출시키는 대목은 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의 절규를 명료하게 하는 대목이다. 1959년 12월 『사상계』 77호를 통해 발표된 김동립의 <대중관리>는 이런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순기능을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급의 물성화가 이계장의 문화주택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또한 주목할 대목이다.

"집 살 돈이 없어서 세를 든 것은 아니다. 안방의 다락 구석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둔 조그만 금고. 그 속에 들어 있을 이천오백만 환의 현금, 사부 이자로 빌려준 사백만 환의 차용증서. 그리고 역시 숨겨둔,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지구형 라디오. 동생이 굴리고 있는 59년형 쎄단 ‘닷지’의 시가(時價). 이러한 그의 재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한 정도면 나도 이제를 허리를 펴고 한숨 쉴 수 있는 여유는 생긴 게 아닌가. 그나마 지금쯤은 아내가 현금으로 바꿔놨을 어젯밤의 수표. 일금 이백만환정.
마음만 내키면 언제라도 바꿔칠 수 있는 백칠십 만환의 전셋집과 최신 문화주택. 플라스틱의 찬란한 타일을 깐 응접실. 형광등이 산뜻한 불빛 아래서 빛나는 텔레비전, 전축. 전축 옆에는 몇 년을 계속 진열한 타임 잡지. 미처 읽지는 못했지만…… 옆방에는 일제 전기냉장고, 전기세탁기가 아내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그때 이계장은 때를 한 벌 벗는 거다. 가슴이 뛴다. 사실 버스나 전차에 오르면 저놈이 쌍놈인지, 이자가 양반인지, 내가 촌놈의 자손인지 누가 알 게 뭐람! 다같이 고르게 사는 세상이것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買] 수 있는 호화로운 생활. 다들 그나 내나 비슷비슷한 놈의, 하여튼 세상은 편리해졌다. 옛날에는 권세있는 대궐집엔 근처에도 못 갔다. 그러나 지금이야 그 옆에다 일류 문화주택을 짓는 것도 다만 돈 문제다. 그것도 대문 기둥에서부터 벽으로 쭉 인조석으로 빛내고, 정원의 비싼 상록수가 대궐과의 차질을 비중하는 척도가 되는 거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 가지는 미묘한 차이와 교양이라는 섬세한 뉘앙스가 풍기는 차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뭐람. 하긴 나야 대학을 못 나왔지만 미자(美子)와 철(徹)이, 고 내 이세(二世)들이야 삼류 대학을 시키더라도 나오고 말 것이 아닌가. 그리고 철이놈은 공과대학을 보내서 어느 놈이 탐내지도 못하고 끌어내리지도 못할 기술부장(技術部長)을 시켜야지. 그렇다! 문제는 돈과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계장이라는 지위!"

from 김동립, <
대중관리>, [20세기 한국소설 18], 파주, (주)창비, 2007년 11월(초판 7쇄), 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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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0.12.01 11:09

소위 문화주택이 유행하던 1930년대 실제 문화주택에 사는 신여성의 신가정 생활에 대한 묘사는 1915년의 가정박람회와 새로운 문물과 사상의 이입에 따른 생활의 변화를 그대로 드러내는 실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문화주택의 일상적 거주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1932년 6월호 『신동아』는 「신가정 내용공개」라는 큰 타이틀로 22개의 질문사항을 담아내고 그 결과를 가상적으로 풀어낸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때 신동아에 실린 질문을 바탕으로 이미 이효석의 작품 등을 통해 문화촌으로 알려진 동소문동의 이애신이라는 이름의 주부를 통해 언급하고 있는데, 1930년대의 경성의 거주문화 일단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동기가 된다.

"저는 올해로 결혼 한지 오년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스물 아홉이니까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허자마자 현재 은행에 다니는 남편을 만난 셈이네요. 네? 결혼이요? 동창생들이 그러하듯 저도 정동 교회를 빌려 신식 결혼을 하였습니다. 신혼여행은 은행에 다니는 남편이 휴가를 내서 원산 해수욕장으로 다녀온 것이 기억납니다. 미션스쿨에서 배워온 만큼 저 역시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 교회에서는 찬송모임을 갖고 있어서 가끔 여고 동창생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현재 
우리 가족은 남편과 저, 계집애들 세 명과 막내아들 한 명, 그리고 시부모님까지 도합 여덟 명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저희가 동소문동으로 이사 간 후로 시부모님과는 분가를 했지요. 삼청동에 사시는 시댁엔 자주 가고 있습니다만, 시어머님은 저희 집을 못마땅하게 여기세요. 요즘 한창 유행하는 문화주택을 거금 천원을 들여 짓긴 하였는데, 유리창과 부엌 환기에 특히 신경을 쓴 만큼 이전의 부엌에서 겨울철에 고생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거든요. 저는 우리 집의 훤한 거실이 마음에 들어요.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산 소파와 양탄자를 깔아보니 훨씬 안락하고 집안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이게 싫으신가 봐요. 하루는 장소가 좁아 3대째 물려 내려온 뒤주며 찬장이 대청에서 치워버렸는데, 이걸 보시고 매우 역정을 내셨어요. 뒤주에 있던 쌀은 부엌 한켠에 정돈되어 있는데 어머님은 집안의 복을 함부로 내쳤다고 하시며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시질 않으셨습니다.
아침 
식사는 간편하게 먹는 편입니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드리는 밑반찬이 예전보다 훨씬 부실해졌다고 자주 핀잔을 주십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학교 가사 실습 때 배운 방식으로 조리를 합니다. 양보다는 질이라는 생각에 단백질과 칼슘을 보강하여 남편과 아이들 영양에 정성을 기울인답니다. 카스테라와 비스켓같은 서양 간식도 손수 만듭니다. 친구들 중엔 기자를 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도 많습니다만, 아이들 네 명을 키우고 있자니, 밖에 나갈 시간조차 없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종로에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청매 양장점에서 맞춘 모직 코트를 입고 나갔지요. 일본 잡지에서 본 최신패션을 그대로 맞춰달라고 했지요. 저한테 연애 한번 하자고 쳐다보던 남성들도 많았어요.(웃음)
저의 
가정생활은 크게 즐겁거나 노엽지는 않습니다만, 새해 소망은 남편이 좀 일찍 들어오셨으면 좋겠어요. 저 혼자 육아를 감당하기 힘든데, 남편은 은행일이 바쁘신지 매일 늦으시네요. 얼마 전에는 할부로 축음기를 샀어요. 요새는 빅타레코드니 시에론 레코드에서 가족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클래식 레코드를 많이 기획해서 팔더군요. 가족 공통의 취미를 한번 만들어 남편과 가족 모두에게 홈-스위트 홈의 꿈을 실현시켜주고 싶습니다."

from
백지혜, 『스위트 홈의 기원』, 서울, 살림출판사, 2005년 1월, 89~90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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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0.11.18 15:16

1975년 문학사상을 통해 발표된 최일남의 단편 <노새 두 마리>는 아직도 연탄이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취사연료이던 시절에 서울로 상경하기 전에 마부 일을 맡아보던 아버지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바뀐 일상 속에서 새로 이사온 동네의 연탄공장 배달일을 맡아보고 어머니는 여전히 대가집의 침모노릇을 하던 집안의 아이가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매우 짧은 작품이다.
 
지나온 시절에 군림하던 여러 가지들이 서서히, 그러나 급작스럽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시절에 여전히 노새를 부리며 연탄배달일을 하던 아버지와 언제나 탄가루를 뒤집어쓴 아버지를 따라 일을 도우면서 ‘까마귀 새끼’라는 별명을 얻은 아이가 다시 삼륜차에 밀리는 노새라는 운송수단을 부여잡고 도회지의 끄트머리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도회지 주변부 사람들의 애환과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 언덕길을 오르다 힘에 지쳐 고삐가 풀린 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회의 공간으로 도망을 간 노새나 그런 노새를 찾아 하룻밤을 지낸 뒤 다시 거리로 나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또 다른 노새로 겹쳐지며 작품을 마감하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변화의 덧없음과 그 덧없음 속의 사람이 중첩됨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읽게 된다.

"우리 동네는 변두리였으므로 얼마 전까지도 모두 그날그날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연탄 배달도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구멍가게에서 두서너 장을 사서는 새끼줄에 대롱대롱 매달고 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랬는데 2,3년 전부터 아직도 많은 빈터에 집터가 다져지고, 하나둘 문화주택이 들어서더니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동네꼴이 잡혀 갔다. 원래부터 있던 허름한 집들과 새로 생긴 집들과는 골목 하나를 경계로 하여 금을 긋듯 나누어져 있었는데, 먼 데서 보면 제법 그럴싸한 동네로 보였다. 일단 들어와 보면 지저분한 헌 동네가 이웃에 널려 있지만 그냥 먼발치로만 보면 3층 슬라부집들에 가려 닥지닥지 붙인 판잣집 등속이 보이지 않으므로 서울의 변두리에 흔한 여느 신흥 부락으로만 보였다.
네가 이렇게 바뀌자 그것을 가장 좋아한 사람 중의 하나가 아버지였다. 아까 말한 대로 그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연탄을 두서너 장, 많아야 2,30장씩만 사가는 터여서 아버지의 일거리는 적고 따라서 이곳에서 2,3킬로나 떨어진 딴 동네까지 배달을 가야 했는데 동네에 새 집이 많이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렇게 먼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집에서 연탄을 한번 들여놓았다 하면 몇 달씩 때니까 자주 주문을 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일감이 이 동네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니고, 여전히 타동네까지 노새 마차를 몰기는 했지만 그 전보다는 자주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from 최일남, <노새 두 마리>, [
꿈길과 말길 외], 한국소설문학대계 41, 동아출판사, 1995년 5월,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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