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집_일기2014.03.12 12:09

겨울을 바쁜 마음으로 보냈다. 새해를 맞이한 것이 며칠 전처럼 느껴지지만 절기는 벌써 경칩(驚蟄)을 넘겨 춘분(春分)을 향해 내닫는다. 몇 편의 글을 쓰고 새학기 강의를 준비하고 별안간 흥미를 가진 주제에 주목하여 새 책 한 권을 구상하는 일로 겨울을 보냈다. 마당이 딸린 집의 겨울이란 농사짓는 분들의 겨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특별할 것이 없이 느슨하고 느긋하다.

 

언제나 그러하듯 봄은 늘 소리 없이 온다. 아직도 아침이면 쌀쌀하지만 마당 곳곳은 힘찬 박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각종 매체가 실어 나르는 봄소식과 달리 살구나무집의 봄을 알리는 전령은 조막손이마냥 하늘을 향해 새순을 내는 꼬마수선화를 필두로 겨울을 이겨낸 상처를 그대로 이파리에 화인처럼 담아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튜울립, 그리고 파릇파릇한 별 모양의 연둣빛 이파리를 널리 퍼트리며 새싹을 내는 섬초롱꽃이 단연 으뜸이다. 매발톱과 해국은 지난 해의 누런 이파리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촘촘한 겹잎을 무덤덤하게 보여준다. 돌단풍은 이런 녀석들과 달리 꽃대를 먼저 올리며 봄 소식을 알리고 딱딱하게 굳은 단풍나무 아래의 척박한 땅에서는 둥글레가 마치 매듭을 풀 듯 머리를 내민다. 살구나무 아랫집의 봄 풍경이다.

 

 

 

절기가 봄을 알리는 까닭에 이른 아침이나 주말이면 마당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마루도 덩달아 봄을 느끼는지 아침이면 창 앞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조르고, 새봄을 알리는 새들의 울음소리에 하늘을 향해 짖어대기를 거듭한다. 아내와 아이들 역시 부척 바빠졌다. 간장을 담아야 하는 날을 놓쳤다고 안타까움을 표하던 아내는 지난 일요일 손이 없는 날이라면서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소금물을 풀고 달걀을 띄워 간을 맞추더니 어느새 항아리 그득 간장을 담았다. 지난해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 이어진다.

 

서재 앞의 거목 살구나무도 가녀린 줄기마다 꽃망울 달았고, 햇빛을 많이 받는 마당의 매실은 연분홍 봉오리를 탱탱하게 키워 간다. 주말을 이용해 아이들은 방산시장으로 나서 양초 재료를 구입한 뒤 향초를 만들고, ‘마음이 일랑일랑이라는 글을 써 봄을 맞이하고 있으며, 봄맞이가 게으른 것이 아닐까 염려한 나는 서둘러 동네 농원으로 나서서 한해살이 풀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당 한구석에 앵초와 솔채 그리고 장구채를 구입해 심은 뒤 매일 아침이면 녀석들의 생장상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마침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다. 바짝 마른 겨울의 푸석함이 오늘 내릴 비로 차분하게 가라앉으면 본격적인 봄이 오리라는 예감이고, 아직은 누런 마당도 제법 활기를 띠고 계절을 복원하리라는 기대가 자못 크다. 올해는 꽃을 심지 않으리라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고 있던 아내도 아이들더러 날이 조금 더 풀리면 양재동 꽃시장으로 나들이를 하자고 벌써 다짐을 잊은 모양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대청소를 하고, 겨우내 묵은 이불빨래를 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추운 겨울 동안 실내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붙여 두었던 뽁뽁이 단열재도 떼어낸 지 오래다. 봄은 이렇듯 꼭 기온이 높아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풍경2013.01.10 19:58

지난 해 감나무를 옮겨 심을 때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잘하게 달렸단 감이 집 마당으로 올긴 뒤 모두 떨어지는 바람에 올 가을은 노심초사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제법 굵은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주었다. 감이 본래의 색을 띨 무렵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의 까치들이 아침저녁으로 마당으로 와 고운 빛깔로 육피를 키우는 녀석들만 부리로 흠집을 내는 바람에 보름 쯤 전에 신문지를 잘라 돌돌 말아 까치들의 눈에 쉽사리 띠지 않도록 나름의 조치를 해 놓았고, 이 조치가 효험을 봐 주말을 이용해 큰아이와 더불어 감을 수확하였다.

 

 

마침 가을볕도 좋아 눈이 부실 정도였고, 10월이라 해도 반팔로 밖에 다닐 정도여서 오후의 햇살 아래서 마치 과수원의 과실을 수확하는 것처럼 들뜬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 오래도록 달려 있는 풍경이 좋으니 몇 개는 남겨두라 성화를 했고, 강아지 마루는 좋아라 마당을 이리저리 뛰었다.

 

 

하나씩 제법 가을빛을 띤 감을 수확하다보니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내심 놀라면서 아내더러 광주리 하나를 가져달 줄 것을 부탁했고, 크기가 모두 비슷한 것들을 모두 수확하고 보니 60여 개를 조금 넘는 숫자였다. 겉으로 보아 그 정도의 감을 과연 생산할 수 있을까 싶었던 모양의 감나무지만 생존을 위한 치열한 여름나기를 한 모양이다. 가지 끝에 달린 몇 알은 가을이 깊어질 즈음 주변의 먹거리가 부족하다 싶을 때 산새들이 날아와 배를 채우라는 심정에서 '까칩밥'으로 남겨두었다. 살구나무 아랫집의 가을 전람회에 새롭게 보태질 풍경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일기2012.06.02 01:07

화사한 봄꽃의 향연이 끝나는가 싶기 무섭게 이제는 본격적인 녹음의 시간이라는 듯 집 안팎의 나무며 화초들이 잎사귀를 무성하게 키우고 있다. 어느 덧 매화는 매실을 알알이 굵게 만들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고, 감꽃이 피는가 하더니 지더니 마치 썩어가는 듯한 꽃잎 뒤로 과육을 키우기 시작했다.

 

 

 

일상에 쫓기면서도 주말이면 안팎의 마당을 오르내리면서 아내의 청을 들어준다는 핑계로 내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나니 외부공간이 제법 다른 모습을 갖추었다. 올해 늦봄을 지내며 가장 커다랗게 풍경을 바꾼 곳은 대문 안의 경사마당이다. 1년 전 6월 초의 모습은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는 구배를 따라 제법 급한 경사를 갖는 경사마당의 흙이 작은 비에도 떠밀릴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콰이어메쉬를 깔고 그 위에 토끼풀 씨앗을 뿌려 구배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에 온통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 한 해를 지나고 나서는 좀 더 유쾌한 봄맞이를 위해 여러해살이 화초들을 심고 꽃 빛깔의 조화도 생각해보는 등 여유를 찾는다는 생각이었고, 1년을 훨씬 넘기면서 경사마당의 제법 큰 변화를 감행하였다.

 

가장 큰 변화란 그동안의 자연스런 경사면을 화계(花階)로 꾸민다는 취지에서 중간중간에 단을 두는 방법으로 변경한 것이다. 올 들어 큰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비가 올라치면 노심초사하면서 밖을 내다보는 걱정을 덜자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고, 마침 집에는 에스화이브가 공사를 마치면서 남겨주고 간 데크용 목재가 제법 있었기 때문에 지난 주말을 이용해 전격적으로 경사마당을 화계로 바꾸기로 작정하였고, 반나절에 걸쳐 큰아이와 함께 가공-조립-시공을 거쳐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

 

 

 

경사면을 제법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고나니 그동안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제 역할을 다했던 토끼풀을 걷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경사마당 거의 모든 곳에 왕성하게 자란 토끼풀을 훑어내는 일은 제법 힘든 일이다. 잎은 가녀린 까닭에 거두기가 어렵지 않으나 문제는 서로 매듭을 만들면서 지천으로 퍼져 있는 뿌리였다. 뿌리를 뽑을 때면 안타깝게도 그동안 다져졌던 흙이 무더기로 뿌리와 함께 들려나오는 바람에 지난 1년의 안정화 과정이 헛일이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사면이 수평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만 남기고 지상의 토끼풀 대부분을 제거하고 보니 구멍이 숭숭난 형국이었다. 다시 양재동 꽃시장과 풍덕천 야생화 농원을 몇 번 오가면서 값싸고 겨울을 쉽게 나는 여러해살이 야생화를 종류별로 구해 빈 곳에 심고 보니 제법 화계의 모습을 갖추었다. 황금달맞이와 꽃뱀무, 오공국화, 바람꽃 등을 심어두니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가족 모두가 좋아라 했다.

 

 

 

 

우리집에서 경사마당을 화계로 바꾸는 동안에 윗집 친구는 지하실에 보관중인 방부목을 이용해 외부 식탁이나 벤치로 사용할 수 있는 의자를 직접 제작하였다. 모두 4개를 만들었는데 오가면서 눈길만 주고 아무런 힘도 보태지 않은 아랫집에 하나를 선뜻 내주었다. 그리고는 스테인을 칠해 마당 귀퉁이에 놓으면 실용적으로도 좋을 것이고 보기에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마침 오늘은 큰아이와 내가 모두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조금 이른 시간부터 서둘러 광주시 오포에 가 오일스테인 한 통을 구입해 점심식사 후 본격적으로 칠을 해 해넘이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 생각에는 빨간색을 입혀 조금은 동화스러운 모습을 연출하자고 했지만 조색(調色)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의견에 따라 그대로 칠할 수 있는 기본색을 구입해 칠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였다.

 

 

 

계절을 어느덧 여름이다. 한낮의 더위가 몸을 부리지 못하도록 강제하는가 하면 풍경의 녹색은 점점 무겁고 짙어졌다. 겨울을 잘 견딘 장미는 더 이상 붉은 색이 없다는 항변이라도 하듯 빨간 꽃을 큼직하게 틔웠고, 연한 초록의 궁극을 보이는 황금조팝도 분홍색의 탐스런 꽃잎을 한 곳으로 모았다. 경사마당의 사사와 기린초는 해를 잘 넘긴 탓인지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하면서 경사마당의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으며, 비비추와 무늬바위취도 꽃대를 올리거나 꽃을 만개하면서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살구나무 아랫집은 이제 늦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풍경에 빠졌다. 살구나무의 녹음이 여름이라면 화계의 다채로운 표정은 여전히 봄을 아쉬워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일기2012.05.15 14:21

5월 중순에 들어서며 마당의 온갖 나무와 초화류가 마치 동물성으로 변이된 것처럼 매일이 다른 풍경이다. 이웃들도 서로의 집을 오가며 무엇이 어떻게 표정을 바꾸었는지를 설명하고 구경하느라 휴일의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살구나무 아랫집도 다르지 않아 부실한 살구가 서재마당을 그득 채우며 떨어지고 식구들의 마음을 졸였던 감나무는 제법이지 싶게 감꽃 피우기에 열중이다.

 

 

이맘 때쯤이면 으레 그러하듯 아내는 몇 가지 청을 해 왔다. 그동안 배롱나무 아래를 마치 고리 모양으로 감싸고 있던 영산홍을 마당의 한켠으로 모으고 그 자리에 키가 크지 않은 야생화를 심고 싶다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이고, 아랫집과 윗집을 잇는 계단참 언저리의 남천을 안마당으로 옮기고 그곳에도 꽃을 피우는 병꽃을 심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왕에 휴일이고 집에서 보내기에는 많은 시간이어서 그렇게 하자 동의하고 큰아이와 더불어 죽전의 야생화 농원을 찾아 말발도리(사실 아내가 좋아하는 야생화)와 낮달맞이(분홍달맞이)를 제법 많이 구해 영산홍을 옆으로 밀어내 생긴 자리에 그득하게 심었다. 윗집 식구들도 아랫집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좋다면서 집을 찾아오기도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마당에서 차를 마시는 도중에 아내의 청이 이어졌다. 돌아오는 수요일 쯤에 뒷마당 계단참의 남천을 모두 뽑아 한식담장 아래의 남천 무리에 같이 옮겨 심고 그 자리에 병꽃을 심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계속 찜찜한 곳이어서 이 일만 마무리되면 올해 여름맞이 마당가꾸기의 대미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큰아이가 따라 나섰고 이웃집 아이도 덩달아 양재동 구경에 따라나선다 하여 서둘러 양재동 화훼시장에 들러 병꽃무리와 수호초 다섯 포트를 새로 구해 왔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아내는 경사마당의 작은 불두화를 뒷마당과 안마당으로 옮겨 심었고, 남천도 모두 옮겨 자리를 바워둔 상황이었다. 이미 해는 서산을 넘고 이웃집에서 준비하는 동네 저녁모임이 준비되는 중이었다. 서둘러 병꽃을 남천이 있던 자리에 빼곡하게 밀식하니 윗집 친구가 카메라를 들고 나와 우리집 세 식구가 병꽃을 심는 모습을 담았고 뒷정리를 마치니 바로 저녁시간이 되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웃집에서 준비한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날이 제법 따뜻했지만 해가 진 시간에는 아직도 냉기가 제법이었고, 밤이 늦도록 즐겁고 유쾌한 얘기가 이어졌으며, 이웃집의 안마당과 뒷마당을 오가며 봄 풍경과 향기에 취할 수 있었다.

 

 

 

이제 봄맞이 마당가꾸기 시즌이 마무리되는 시기인지 요즘의 야생화 농원은 여름꽃 준비가 한창이다. 일주일 전에는 보지 못했던 야생화가 새롭게 등장하였고, 이미 꽃을 피워 이제 한 해 뒤에나 꽃을 볼 수 있는 것들은 헐한 가격에 판매되는 모습이다. 병꽃도 그 가운데 하나여서 온실에서 이미 만개한 경우는 다른 것들에 비해 제법 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런 탓인지 남천이 있던 자리를 그득하게 메운 병꽃 다발은 들인 비용에 비해 식구들에게 주는 즐거움이 더욱 큰 듯 여겨진다.

 

 

 

늦은 밤에는 반가운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지난 1월에 교보문고 기술공학 부문의 베스트셀러 1위를 한 동안 차지했던 살구나무집 이야기인 <아파트와 바꾼 집>이 다시 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이다. 출판사에 물어보니 특별한 이벤트를 벌인 것도 아니라는 대답이었는데 다시 네 달 만에 주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무슨 영문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봄을 보내는 일을 모두 마친 셈이다.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바꾸면서 짙은 녹음과 밝은 햇빛을 줄 여름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셈이다. 곧 비가 온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여름은 오는 모양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일기2012.04.01 22:59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서자 윗집 친구 내외의 대화가 윗집 마당에서 들려온다. 소리 내어 뭐하냐고 묻자 담장 위로 장갑을 끼고 모자까지 갖춘 내외의 모습이 드러난다. 아침부터 마당의 잡초도 뽑고, 겨우내 손을 보지 않았던 마당을 둘러본다는 것이었다. 뒤따라 마당으로 나선 아내가 윗집 내외와 인사를 나누더나 내게 양재동 꽃시장이나 다녀오자며 서두를 것을 제안했고, 큰 아이 역시 그러자고 동의하는 바람에 모처럼의 일요일 나들이에 나섰다.

양재동 꽃시장은 우리 식구들처럼 봄기운에 들뜬 상춘객들로 북적거렸고 활기를 띤 꽃시장과 나무시장은 연신 크고 작은 짐차들이 오가며 활력을 더했다. 서너 군데를 둘러보면서 몇 가지 야생화를 구입했고, 오래 전부터 담장 한 쪽을 배경 삼아 심었으면 하던 아내의 뜻대로 화살나무 작은 것 세 그루를 구입하였다. 나는 커다란 꽃이 풍성하게 열리는 작약이나 모란 등을 좋아하는 까닭에 다른 품종들에 비해 조금 값이 더 가는 모란 두 뿌리를 구입했고, 아이는 향기가 천리까지 간다는 천리향과 수호초 몇 뿌리를 골라 카트에 올렸다. 다양한 봄맞이 야생화들은 모두 포트에 심겨진 아주 여린 줄기들이어서 포트당 1,000원 정도씩 하지만 그것도 이것저것 모아 놓고 보니 오늘 구입한 묘목과 포트값이 모두 5만 원이나 되었다. 단독주택으로 옮긴 후 잔돈이 남지 않는다는 아내의 투정 아닌 투정이 이어졌고, 안마당이며 서재마당, 현관마당 등에 구입한 묘목이나 포트를 옮겨 심는 일도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지난 1년 동안의 경험은 마음을 서두르게 해 점심식사를 집에서 가볍게 하자고 한 뒤 서둘러 양재동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작업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서 바쁜 손놀림을 한 지 두 시간 정도 만에 오늘의 일은 일단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라는 뜻에서 조성한 대문 옆 영산홍 무리를 좀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집 안에 있던 영산홍 열 뿌리 정도를 밖으로 내서 보태 심는 일과 안마당에 화살나무를 일렬로 세워 심는 일 이외에는 삽을 쓸 일이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모종삽 정도로 쉽게 심을 수 있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앙증맞은 크기의 포트에 담긴 다채로운 야생화들은 모두 아내가 나서서 심을 곳을 정하거나 새로 자리를 정해 옮길 것을 정하면 나와 큰아이가 이를 옮기고 갈무리 하는 방법으로 마당일이 진행되었다. 할미꽃은 대문 안 경사마당의 윗부분에 서로 삼각형을 이루면서 자리를 잡았고, 내가 고른 모란은 내 뜻대로 안마당의 한식담장 남측에 불두화와 교차로 서는 자리에 새롭게 심었다. 큰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만든 플랜트 박스에 천리향과 산호수, 수호초 등을 옮겨 심어 현관 입구를 풍성한 풍경이 되도록 힘을 보탰다. 그리고 식물도감과 야생화 조경도감을 통해 얻은 지식을 활용해 바위틈에서 잘 자란다는 바위솔과 바위채송화는 경사마당의 돌확 주변에 심었으며, 향기와 꽃이 좋기로 소문난 꽃댕강나무는 빨리 자라 담장을 넘어 동네에 향기로움 기운과 붉은 기운이 넘치도록 하자는 뜻에서 이웃과 면하는 안마당의 담장 아래 자리를 잡아 일렬로 식재하였다.

이밖에도 처녀치마와 양지꽃은 서재마당의 경사가 시작되는 지점에 나란히 자리를 잡아 주었으며, 꽃이 예쁠 것이라며 큰아이가 한 포트만 차에 실었던 섬초롱꽃도 오롯한 탱자나무 묘목 아래 둥지를 틀었다. 아직 새순도 나오지 않은 돌단풍은 여전히 구근의 모습이었는데 아내와 큰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대더니 서재마당 돌확 옆에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창 마당작업에 열중할 즈음 이웃집 내외가 탱글탱글하고 앙증맞은 크기의 호박고구마 스무 개 정도를 쪄서 내오셨다. 보아하니 꽃시장에 다녀오신 것 같고, 한창 일을 하실 것으로 생각되어 일하다가 먹으면 제 맛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쪄서 가져왔다는 말씀과 더불어 아내가 새로 심었다고 자랑한 화살나무와 꽃댕강나무의 자리 잡은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마침 아내는 그 집에서 며칠 전 얻어온 좀눈향도 오늘 작업하는 김에 심었다면서 경사마당의 좀눈향 자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꽃시장에 다녀와 몇 번의 삽일을 하는 사이 어느 덧 하루가 저물기 시작한다. 겨울보다 낮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해가 질쯤이면 날이 차가울 정도를 느껴졌고, 작업으로 데워진 몸도 식기 시작하였다. 4월 1일, 4월의 첫 날을 맞아 감행한 양재동 나들이는 살구나무집 식구들에게는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 같은 느낌이다.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즐겁고 유쾌한 살구나무집에서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일기2012.02.15 23:53

별안간 풀렸던 날이 다시 스산한 느낌이다. 캠퍼스는 온통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어중간한 표정과 몸짓의 어중간한 나이 또래들로 부산스럽다. 올 봄에 새로 들어올 합격생들을 불러 모아 강원도 속초로 학교 소개를 겸한 놀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어서 제법 분주하다.

살구나무집 이야기를 담은 <아파트와 바꾼 집>이 서점가에서 나름의 인기몰이를 하는지 제법 여러 곳에서 강연 요청이 있었다. 벌써 두 번이나 살구나무집을 소개했고, 앞으로도 예정된 것만 두 번이 남아 있었다. 그런 까닭에 틈이 생길 때마다 강연 자료를 고치고 채우기를 여러 차례 했지만 1년 동안의 주거비를 완벽하게 확정해 알려주지 못한 대목이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 2011년 1월에 새 집으로 들어오며 집 자체가 온기를 머금고 있도록 집을 데우고 나쁜 기운을 빼내는 작업(베이크 아웃)을 며칠 동안 계속했던 까닭에 그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사용한 도시가스와 전기 사용량이 평소 살면서 쓴 것과 비슷한 것인지 확실히 챙겨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파트와 바꾼 집>을 통해 지난 10개월 동안의 관리비를 그 전에 살던 서울 중계동의 아파트와 세밀하게 비교해보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일 년이 아니기에 실제로 사용하고 지불한 열두 달 모두의 주거비를 온전히 비교하고 싶었다.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 확인해보니 아직 고지서가 집으로는 배달되지 않은 2월분 상하수도 요금과 전기요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일 년 동안의 살구나무 아랫집 주거비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월별 비교를 통해 확인한 결과는 <아파트와 바꾼 집>에서 밝힌 내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노랗게 보이는 중계동의 41평형 아파트의 월별 평균 관리비를 37만 5천 원 정도로 본다면 붉은 선으로 그려진 살구나무집의 월별 관리비 평균은 보안업체에 지불하는 월 9만 원의 비용과 화재보험료 8천 원을 모두 포함해 37만 원 정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책에서 밝힌 것처럼 전용면적은 1.7배 늘려 사용하고 관리비는 오히려 만 원 정도를 덜 쓰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크고 작은 변수가 있을 수 있다. 겨울이 너무 춥거나 여름이 상대적으로 더울 경우 가스나 전기를 많이 사용할 것이고, 혹시라도 보일러나 전기설비 등에 문제가 생기면 수리비용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처에 쓰일 돈은 아파트라도 별도의 항목으로 징구될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를 거칠게 비교해도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지난 일년 동안의 관리비 비교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걱정했던 일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늦은 밤에는 큰아이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어제 저녁에 금민 백지혜씨로부터 받은 정성스런 연하장이 생각나 가방에 넣어 두었던 첩을 꺼내 서재 문에 붙여두니 대문과 현관에 붙였던 입춘첩과 더불어 마치 묵향이 묻어나는 듯한 집 안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평화로운 겨울밤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풍경2012.01.16 11:39


깔끔하고 멋진 풍경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집 밖에 나섰다가 우연히 카메라에 잡은 이 풍경은 내가 제법 좋아하는 살구나무 아랫집의 모습이다. 전면폭이 꽤 넓은 집터의 조건은 문 앞을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웅장한' 분위기를 줄 수밖에 없는 설계의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는 집'을 원했던 나와 윗집 친구의 강한 주장은 건축가 조남호 선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모양이다.

경사지인 집터에 집을 앉히고 식구들이 정온한 마당을 갖기 원한다는 점에서 건축가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옹벽을 높이고 그 위에 마당을 놓아야 할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다리꼴로 자리한 집터이다 보니 엄청나게 긴 옹벽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부담이었으리라. 건축가의 선택은 옹벽 전체를 요철이 있는 면으로 만들거나 재료를 달리 하거나 하는 방법과 더불어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는 집이 되기 위한 조건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옹벽의 귀퉁이를 크게 덜어내 길을 오가는 이웃들이 그 틈을 통해 경사마당을 관상하거나 경사마당의 끄트머리에 높게 솟은 살구나무의 자태를 보게 하는 것인데 강아지 산책을 겸해 집 앞을 오가는 이들은 가끔씩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집 안을 들여다본다. 그 사이 우리 식구들과 말문도 트고 마당가꾸기의 조언도 잊지 않는다. 주차창 입구의 자산홍과 영산홍은 거친 골목에 자그마한 생기를 주고, 옹벽 위 마당의 투시난간은 마당의 계절을 이웃에게 알려준다. 물론 노출콘크리트와 붓칠로 마감된 스터코 벽면 그리고 투시형 난간 일부를 목재로 마감한 건축가의 세심함은 이곳에 원래 이 집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풍경2012.01.14 22:10
지금은 겨울 추위의 절정. 문득 살구나무집 여름을 떠올린다.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전원주택'이라 할만한 요건과는 딴판인 살구나무집에는(길건너편으로 초등학교와 면하고, 마당에서는 길 건너편의 초고층아파트가 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간공 김세필 묘역과 공원을 접하고 있어 여름이 제법 풍성하다. 비라도 조금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청개구리가 마당을 찾고, 비를 피하려 길을 나섰다가 낭패를 본 참개구리는 현관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식구들이 집에 있으면 마치 골목대장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하여 집 안팎의 모든 소리에 민감하게 대꾸하느라 목이 쉬도록 짖어대는 강아지 '마루'에게도 여름을 심심치 않은 계절이다. 살구나무를 기어올라 변태를 한 매미가 밝은 빛을 찾아 서재의 방충망에 달라붙으면 맴미소리에 뒤질세라 오랜 동안 짖어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매미가 문득 소리를 멈추고 사위가 조용해지면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마루 또한 짖기를 멈추고 눈싸움으로 자세를 바꾼다.


여름이면 그렇게 살구나무집은 식구들에게도 계절의 속내를 드러내준다. 올 겨울 추위가 절정이라는 소식에 기온은 높았지만 평온한 일상으로 날을 지냈던 2011년 여름 풍경을 가슴에서 꺼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풍경2012.01.13 19:00
친구와 어울려 나란히 터를 잡고 집을 지어 더불어 살게 된 죽전의 우리집 이름은 '살구나무집'이다. 마치 음식점이거나 혹은 장어구이집이라면 어울릴만한 집 이름인 셈이다. 한국일보 기자이신 서화숙 선생님께 얻은 책 <마당의 순례자>를 읽다보니 우리집에 붙인 이름이 이미 선생님이 먼저 쓰셨던 이름이어서 송구하기는 하지만 이미 대문 앞에 명패를 떡하니 붙인 탓에 물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당연히 살구나무가 집터 바깥의 공원부지에 있고, 수령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족히 100년은 넘었으리라는 것이 주변 분들의 생각이다.


봄이 한창인 4월 15일을 전후해서 살구나무꽃이 만개한다. 연한 분홍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흰빛으로 변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살구꽃이다. 과실은 6월 중순이면 주렁주렁 달린다. 굳이 손을 보태서 열매를 얻고자 한 나무가 아닌 까닭에 장에서 파는 열매보다는 조금 작지만 가지마다 열매를 단 모습을 보면 자연의 힘이 가지는 힘에 엄숙함을 더하기도 한다.

그 살구나무가 윗집과 아랫집의 경계 부분에 튼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어 윗집 주인인 박인석 교수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이름을 붙여보자고 했던 치기가 지금의 '살구나무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고, 집을 나서거나 들어설 때마다 그 이름의 천진스러움과 촌스러움(?)에 잘 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한다.

2012년 6월 6일에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구나무 과실을 거두기로 미리 약속했다. 그리고 같이 살구잼을 만들기로 공언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살구나무 가지가 2층 큰아이방의 외벽까지 뻗으면 우리집은 말 그대로 살구나무집이 된다. 그런 풍경이 길지 않아 아쉽지만, 그래서 기다려지는 모습이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일기2011.11.23 00:14

아직도 새벽인 오전 6시 30분. 고요와 정적을 깨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 나서니 살구나무집 마당에 배롱나무를 선물하신 어른이 부탁을 했다면서 곧 추위가 닥치니 배롱나무 월동준비를 위해 왔노라며 나니 지긋한 어른 두 분이 집을 찾으신 것이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마당에 나서니 용달차 두 대에 싣고 온 과수원용 사다리며 지푸라기며 노끈 따위의 작업용 공구와 재료들이 로프에 묶여 마당에 올려지고 있었고, 하얀 입김을 내시면서 배롱나무 등을 휘 둘러보더니 지난 주말 우리 식구들의 울력에 대해 ‘잘 싸맸다’ 하시면서도 짚을 풀고 마대자루를 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뭐 잘못한 것이 있느냐고 여쭈니 잘못된 것은 없는데 이번 추위가 심상치 않을 것 같아 이대로는 어렵고 어리 가지 끄트머리까지 짚을 대고 헝겊으로 감싸준다면 내년에 꽃이 풍성하고 잎도 많이 달릴 것이라면서 다른 수종은 그대로 둔 채 배롱나무 월동작업에 돌입하였다. 아직도 해가 뜨기 전이라 사위는 어둑했고 마당의 불을 밝히니 곧 날이 밝을 것이니 괜한 돈 낭비하지 말라며 익숙한 솜씨로 재료를 준비하고 손발을 맞추면서 가지 끄트머리를 한 곳으로 모으더니 짚을 대고 노끈으로 묶은 뒤 다시 그 위를 누런 빛깔의 붕대 같은 소재로 칭칭 동여매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인 까닭에 혹시 아침이라도 거르고 나오셨을 것이 염려되어 더운 홍삼차와 레인지에서 바로 데운 쑥떡을 드리면서 천천히 하시라고 말씀드리자 후후 불며 차를 드시고는 그럴 겨를이 없다면서 일을 서두르셨고 추위가 닥치기 전 며칠이 돈을 버는 시간이라면서 서둘러 일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 나무 월동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해가 뜨고 기온도 조금 올라가기 시작할 무렵 큰일은 대강 마무리가 되었고 자잘한 정리 작업이 제법 남았다 싶을 무렵 다시 짚을 한 무더기 옮기시더니 나무밑둥부터 둘레를 세워 감고는 땅에 닿는 부분은 직각으로 꺾어 냉기가 지면으로 바로 스미지 못하도록 하는 작업이 이어졌고 새벽부터 세 시간 정도가 지난 오전 10시 경에 마당의 낙엽이며 지푸라기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마당을 정리하던 어른들께서는 배롱나무 옆의 미스김 라일락을 보시더니 다시 찬 바닥에 앉아 모든 가지로 하나로 묶고 아래서부터 위로 짚을 세우고 묶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 붕대처럼 생긴 싸개용 헝겊 몇 꾸러미와 노끈 한 타래 그리고 집 한 단을 마당의 데크로 올려놓으시면서 지하실에 두고 쓰라 하시면서 휘 둘러보니 감나무와 공작단풍, 산딸나무도 잘 싸매긴 했지만 가지가 갈라지는 부분이 완전치 않으니 시간이 날 때 남겨둔 짚을 조금 대고 오늘 본 것처럼 수목 월동용 붕대로 휘감아 주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른 작업장으로 가야 한다면서 떠나셨다.
 


따뜻한 음식도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드린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적지 않다. 문 밖으로 나서 어르신들을 배웅한 뒤 마치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처럼 보이는 배롱나무를 바라보며 새 순이 틔기를 소망하던 봄, 잎이 무성하더니 드디어 진분홍의 가녀린 꽃잎을 내보여 즐거움을 주었던 여름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붉은 단풍으로 물들던 가을의 배롱을 떠올렸고, 긴 겨울 무사히 견디고 새로 만날 봄을 기다린다는 소망을 전해주시도 했다. 시간이란 참 의미심장한 것이고,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배운 새벽이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