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_을 펴내며2017.06.23 19:45

출판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들게 원고지를 채워나가던 2016년 봄 서울역사편찬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울이천년사] 35권과 40권에 원고를 보태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와 함께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별도로 기획, 발간중인 서울문화마당 시리즈 단행본 가운데 하나인 [근현대 서울의 집] 원고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서울이천년사] 원고만 하더라도 시간에 쫓겨 꾸역꾸역 원고를 썼던 기억이 새록새록한데 새로운 원고, 그것도 단행본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니 일단 어렵다고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판단하고, 사정이 딱하지만 힘들다고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런데 다시 청을 해 와 하는 수 없이 덜컥 그러마고 했고, 결국 원고마감을 가까스로 지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채운 원고지가 600여 장 정도. 물론 그림도 꽤 많아 내심 원고량을 걱정하였지만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잘 마무리 해 주신 덕택에 자그마하고 단정한 책으로 만들어졌다. 2017년 6월 23일이 출간일이니 책이 나온 날 바로 받은 셈이 되었다. 이 책은 비교적 잘 읽히도록 만든다는 것이 의도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써야 할 것은 아니었으니 결국 글솜씨가 문제인 셈이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다시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책은 나왔으니. 이제 모든 잘못은 필자에게 있음이다.

 

여는 글 /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천만 서울시민의 삶의 기억

 

<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2015년 말을 기준으로 서울에는 모두 천만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데 한 세대는 평균 2.39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대략 420만 정도의 세대로 구성되어 대도시 서울에서의 삶을 꾸리고 있다. 역사도시이자 첨단도시, 국제도시로서 한 나라의 수도라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 서울을 움직이는 천만이 넘는 시민은 280만 채에 이르는 에서 하루를 열고 닫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천만의 시민들이 이어가는 일상은 매우 독립적일뿐만 아니라 서울이라는 지리적 공간의 범주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장소와 공간에서 다채로운 삶의 양태를 드러냄으로써 현대도시 서울의 거주풍경을 만들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천만 서울시민의 다양한 삶이 지속되도록 지지하고 지탱하는 최소의 거주단위인 의 유형은 생각과는 달리 몇 가지로 수렴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변화 정도가 가장 적고 비록 그 모습이나 내용이 일부 바뀌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변화주기가 가장 길었던 건축 유형의 하나가 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건축사와 문화사, 생활사를 통해 확인한 바 있을 정도로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서울시민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오늘의 주택유형을 꼽아본다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아파트와 다세대주택, 일반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그것으로 280만 채에 달하는 집이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2015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서울에 존재하는 280만 채에 달하는 [住宅]’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아파트로서 전체 주택유형 중 58.6%를 차지한다. 15년 전인 1990년에 비해 110만 채 이상이 늘어, 전체 서울의 재고주택에서 차지하는 점유비도 35%에서 가장 많이 늘었다. 그러니 서울을 아파트 도시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비약적인 증가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높은 점유비율을 보이는 주택유형은 다세대주택이다. 다세대주택이 654천 채를 넘는 수치를 보임으로써 서울의 재고주택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아파트에 이어 23.4%를 차지한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주택유형을 내림차순으로 살펴보면 누구나 쉬 짐작하듯 일반 단독주택연립주택이 뒤를 있는다. 그 가운데 단독주택은 12.7%를 점하고 있으며, 연립주택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4.2%를 기록하고 있다. 단독주택은 대략 355천 호, 연립주택이 117천 호 정도를 차지한다.

 

그런데 서울시민이라면 짐작할 수 있듯 서울의 주택유형 가운데 끊임없이 늘고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점점 줄어드는 유형도 당연히 존재한다. 이미 서울의 비약적 인구 증가는 거의 그쳤고, 해마다 다르지만 일부 줄어드는 경우도 나타난다.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은 예외 없이 늘어나는 주택유형에 속하지만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유형에 속한다. 근래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이나 축소 등의 변화가 없었고, 인구 역시 급격하게 늘거나 줄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는 곧 오래된 것의 소멸과 새로운 유형의 등장의 반복되며 그 모습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줄어들며 그 자리를 다세대주택이나 아파트가 빠르게 채워나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주거유형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거주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달리 말하면 소위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통해 도시의 공간구조나 풍경이 바뀌었다는 사실로도 설명할 수도 있다. 결국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라는 주택유형으로 서울의 집이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공유주택이니 타운하우스니 하는 새로운 호칭을 가진 집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법률적, 제도적으로 이들의 대부분이 다세대주택이거나 연립주택인 것처럼 오늘날 서울의 집은 유형학적으로 본다면 결코 다양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서울의 집가운데 아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한 비주거용 건물 내 주택을 제외하고 유형학적으로 살피자면 아파트, 다세대주택, 단독주택, 연립주택의 네 가지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근현대 서울의 집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지난 100년 동안 이들이 서울의 집을 대표하게 된 연원을 계통적으로 살피고 그 궤적을 따라 걷는다. 일례로 도시한옥처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커다란 반향을 보이며 대중적 유행을 누렸으나 그 명맥을 잇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 그 가치와 의미가 새롭게 평가되어 70여 년 만에 다시 서울의 집을 대표하는 유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승만 정권 때 도시미화의 방편으로 별안간 궁리된 상가주택이나 허허벌판이던 도시 주변부를 새로운 교외주택지로 만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고안한 점포주택이 서울의 고밀화 과정을 통해 단지형 아파트주상복합아파트로 변태를 거듭했던 사실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흐름을 산책하듯 따라 걷자는 취지로 쓰였다.

 

책 제목 끄트머리에 주택이 아니라 을 택한 이유는 단순히 주택의 형태와 형식에만 주목하는 건축역사와 양식사의 시선에서 벗어나 서울시민들의 보편적, 규범적 생활문화사를 폭넓게 다루어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울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집의 변화 혹은 변이의 과정과 경로를 일정한 궤적에 따라 살핀 뒤 다시 오늘의 모습에 이르게 된 과정을 담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 책은 서울이라는 지리적, 공간적 영역에 주목하되 행정구역의 확장이나 그에 따른 도시계획의 변화 등과 같은 입장에서 조금 비켜선 채 서울 주거문화 흐름과 변화 과정에서 발생한 기원을 찾아보고, 변화의 동인이 무엇인가를 살핀 것이다. 책에 담긴 내용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공감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근현대 100년 동안 서울 사람들이 살아온 풍경이며 기거문화를 소설과 신문 등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대중매체와 각종 문헌자료에 의지해 담아보았다. 물론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이는 모두 필자의 책임으로, 나태함이 빚은 과오다.

 

책을 이루는 글의 덩어리는 모두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 1장은 일제강점기의 단독주택을 대표하는 관사와 사택, 도시한옥과 문화주택으로부터 영단주택을 거쳐 한국전쟁 복구과정에 등장한 다양한 유형의 주택을 살핀 뒤 개발경제기에 등장하게 된 민영주택과 이후 오늘의 보편적 서울의 집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게 된 다세대주택에 이르기까지의 경로와 과정을 살펴보았다. 특히 1960년대 중반 민영주택의 등장과 확산과정을 생활문화사 차원에서 살핌으로써 단독주택의 갈래를 살폈고, 단독주택이 1980년대를 거치며 여러 가지 색다른 유형으로 바뀌게 된 과정을 훑었다.

 

2장은 아파트의 등장과 변화의 흐름을 주로 기술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최초의 아파트와 초기 사례부터 1960년대를 관통하는 정부와 서울시의 아파트 공급 전략을 통해 국민주택의 대표적 유형이었던 아파트를 새삼 확인한 뒤 대한주택공사와 서울시의 아파트 건설 내용을 경향적으로 살폈다. 이를 통해 단지형 아파트와 좌절된 서울시민아파트 등이 도시중간층의 급신장으로 인해 중산층용 맨션아파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기술했다. 그리고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아파트가 서울의 다수를 차지하는 대단위 단지형 아파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3장은 연립주택의 기원과 전망을 다루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노동자주택이나 합숙소의 형태로 일부 등장한 바 있는 연립주택이 한국전쟁 이후 부흥주택 등으로 대표되는 복구와 재건의 시기에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주거유형으로 주목받았던 내용을 먼저 다루었다. 그 뒤를 이어 연립형 주택이 개발경제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실험과 시도를 통해 새로운 보편적 도시주택 유형인 오늘날의 연립주택으로 자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또한 급격하게 신장된 새로운 도시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아파트와의 시장주택 경쟁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아파트의 하위 주택상품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함께 저밀도라는 환경의 질적 조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강남 개발과 함께 고급 연립주택을 일컫는 빌라와 맨션으로 분화하는 과정도 더불어 다루었다.

 

4장은 전후 복구와 수도 서울의 위신 세우기 수단으로 궁리되었던 상가주택과 교외주거지 개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만들어졌던 점포병용주택이 1960년대를 관통하며 도시미화와 정비의 효과적인 방편으로 활용된 상가아파트로 변신하는 과정을 살폈다. 특히, 1970년대에 본격화된 강남 개발에 따른 노선상가 아파트 확대와 일부 중산층 아파트의 일상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아케이드형 맨션아파트를 거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 이르게 된 과정을 눈여겨보았다. 이 과정에서 단독주택이 주를 이루었던 상당수의 교외 점포주택지는 이미 서울의 보편적 주거유형이자 지배적 유형인 대단위 단지형 아파트에 편입되거나 여전히 오래 전의 풍경을 간직한 채 서울의 주거지로 남았음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간추렸다.

 

일정한 시기 혹은 사회변화의 기제이자 가치라고도 할 수 있는 의미어로서의 근대 혹은 현대는 대도시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를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구한말의 개화에서부터 일제강점기의 수탈적 식민지 근대화, 건국과 분단, 산업화과정과 주택시장의 급신장 과정에서 빚어진 인간 소외와 불구적 이미지화를 거쳐 때론 천박한 자본주의의 극한적 양태라고도 불리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지난 백여 년 동안 기거양식의 일정한 질서라 할 수 있는 주거문화는 혼돈과 충돌 그리고 갈등과 수용의 연속이었다. 근현대 서울의 집은 주마간산 격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담아내려고 애쓴 결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서울시민들이 근현대의 시간을 함께 산책하며 어렴풋한 기억을 길어 올려 복원하거나 반추한다면 어떤 이에게는 편리와 풍요, 성장과 발전이라는 양지로 회상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뿌리 뽑힘과 난민 정서로 대표되는 응달의 상흔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아파트와 다세대주택 그리고 연립주택과 단독주택은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 주거유형이자 시민들의 삶을 의탁하는 보편적인 장소이자 사회적 공간이다. 이들이 어떻게 서울의 대표적 주거유형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 근현대 서울의 집을 통해 서울 시민 모두가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삶의 기억을 반추하는 한편 역사도시 서울이 맞닥뜨릴 새로운 시대의 문화풍경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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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집_생각2014.08.27 17:17

 

아파트는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읽어내는 열쇳말이다. ‘주말에는 대형 마트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고 아파트 시세와 사교육 얘기만 나오면 귀를 세우는 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들이 곧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침묵의 조형물이거나 잔뜩 발기한 거대한 난수표라는 문학적 수사나 한 잔 술을 걸친 뒤 노래방에서 목청껏 불러대는 가수 윤수일의 <아파트>가 내심 서러운 것도 그 속에 웅크린 우리들의 자화상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중문화 속의 아파트에는 불통, 외면, 고독, 소외, 불안과 공포가 덧씌워져 있다.

 

무료함의 신세계, 그 속의 부질없는 요지경을 멀리 떨어져 망원경으로 보자면 끝없는 직각과 직선의 세계이자 도시 속의 완벽한 요새로 보일 것이다. 그 요새 안에 쌓아 올려진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케비닛안에는 부적응과 자폐증을 앓는 우리가 도사리고 있다. 지울 수 없는 몽고반점처럼 화인(火印)이 되어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아파트’! 그 안에 놓인 나의 삶!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아파트를 처분하기보다는 차라리 몸을 파는 것이 낫고, 다고 운위되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아파트의 평수와 아이들의 성적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속물들이 사는 평등사회(坪等社會)! 아파트!

 

이 글은 2014년 3월 6일부터 5월 6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회로 열린 [아파트 인생]의 전시 부스에 게시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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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집_생각2013.09.24 17:15

 

 

[주간동아] Cover Story에 얼마 전 보낸 글이 실렸다는 얘기를 고등학교 동창녀석으로부터 들었다. 확인해보려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이런 회원이 아니어서 볼 수 없다는 안내문이 반복되었다. 늘 그러하듯 글 앞에 붙였던 "껍데기는 가라!"라는 다소 선정적이기도 한 제목은 "알맹이 삶은 남고 껍데기 집은 가라!"로 바뀌었다. 제목이 바뀌면 어떠랴. 쓰고자 했던 말이 그대로 활자화 되었으면 그만이지..... 아직 비교를 해보지는 못했으나 원고청탁 후 보냈던 글을 그대로 옮긴다.

 

 

알맹이 삶은 남고 껍데기 집은 가라!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욕망과 계급 사다리라는 통념 버릴 수 없나

 

박철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팔기 위해 사는 것이 집

1801년 벽파가 천주교를 내세워 정적을 숙청한 정치적 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된 다산 정약용은 집 짓고 살아갈 땅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야 하고, 땅의 기운이 맺힌 서너 칸의 집이면 충분하며 방 안에는 천여 권의 책이 꽂힌 책꽂이가 있으면 된다고 했다. 물론 마당이며 연못을 두고 누에치는 잠실 세 칸을 따로 두어 아내와 마주보며 싱긋 웃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치에 신물이 난 까닭인지 문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공문이 당도하더라도 씩 웃으며 응하면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한승원 작가의 소설 [다산]에 쓰인 내용이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훌쩍 지난 오늘 공지영 작가의 소설 [행복한 나의 집]에서는 집이야말로 산악인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인데,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이기에 언제나 돌아와 쉴 만큼 튼튼해야 한다고 묘사되어 있다. , 집이란 세계 속에 자신의 출발점으로서 중심을 잡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굳이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간 실존의 본질은 거주하는 것이고, 거주의 완성은 집을 통해 드러난다는 셈이다.

 

그런데 막상 매일 대하는 현실세계 속의 집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삼이사들이 사는 집이란 것이 대개는 아파트며 오피스텔들이고, 헛간이나 다락방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장남 삼아 숨을 곳이라곤 없는, 그래서 그렇지 않은 곳에 사는 이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한 세상 속의 물건에 불과하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미를 찾는 자식들을 향해 엄마가 살가운 남도 사투리로 구슬프게 얘기하는 내용이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 하면 뷰파인더 안에는 늘 아파트가 담긴다는 푸념이 현실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균적 삶의 현장인 셈이며, 다르지 않음을 통해 현금으로의 교환가치를 유지하려는 속내가 밖으로 드러난 꼴이다.

 

흔히 집을 일컬어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이가 과연 있겠는가.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마음에 품은 생각과는 너무나 달라 팔기 위해 사는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니 만드는 방법 역시 다산이 가졌던 생각이나 세계 속에 위치를 차지하는 개인의 실존적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잘 팔리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팔기 위해 사는 것이 집인 셈이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다.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는 통념

사람들과 말을 섞는 중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눠 주택과 아파트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택이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고,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파트라는 인식이다. 그러니 주택에 사느냐 아파트에 사느냐로 세상의 집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분류 방식이 통용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아파트는 주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만이 집인 셈이니 아파트 사고팔기를 거듭하는 세태를 제대로 짚었다는 사실에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발표하는 부동산대책의 내용을 보아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말 그대로 부동산이라면 한 자리에 꼼짝없이 위치하고 있는 땅이며 건축물에 대한 정책이련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아파트 거래에 관련된 것에 집중하고 있다. 마당 딸린 단독주택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책 방향이 담기지 않고 오로지 아파트의 거래 활성화를 위한 세제 개편이 부동산대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정책입안자들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 역시 우리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부동산대책이란 아파트대책이며 사고팔기를 거듭하는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한 세제 개편인 것이다. 최근 빚어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영유아 무상보육 재원 마련 갈등도 정치적 배경을 제외한다면 중앙정부의 부동산 취득세 영구 인하 정책으로 인한 지방재정의 상대적 고갈이 빚은 현상이다. 그러니 누구를 나무랄 것도 못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가치가 반영된 것이고 그들의 집합체인 사회의 성숙도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질문과 성찰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산 선생의 생각처럼 살아야 한다는 윤리를 설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주택이 중요한 재산이 아닌 사회가 과연 있기는 있는가. 아파트의 노예가 된 한국인, 아파트 평수로 줄을 세우는 한국사회 따위의 대책 없는 자아비판에 생각이 멈춘다면 갈 길은 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에 대해 진지하고도 의미 있는 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의 끄트머리에 그 해답이 있다. 적어도 다음 세대의 우리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담장이나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단지생활이 쾌적하다고 믿는 구체적 실체는 무엇인가?

얄팍한 철문을 닫으면 외부 세계와 철저히 절연되는 권태로운 생활은 과연 내가 꿈꾸었던 삶인가?

전용면적 늘리기와 단지 밖 세상에 대한 치밀한 단절이 자폐적 일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구별 짓기와 이익결사의 주체인 단지 주민 모두는 과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가?

 

껍데기는 가라!

아파트 단지의 온갖 편의시설은 개인의 비용으로 구입한 것이다. 따라서 단지 생활의 편리성 혹은 쾌적함은 스스로 마련한 비용을 들여 구입한 것이다. 그러니 비용을 부담한 나와 그렇지 않은 남을 구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으로 자기를 감싸고 단지 밖의 일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행위가 과연 사회구성원으로서 정당한 것인가. 그렇게 만들어진 표준적 생활공간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삶을 꾸리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브랜드와 평수로 서로를 구별 짓고, 학생들의 석차로 개인을 평가해 줄을 세우는 매일의 삶이 행복감 대신에 고단함을 주는 것은 아닐까.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아파트사회는 앞으로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가치를 담보하는 것인가. 질문과 대답은 끝이 없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칼럼을 통해 아파트 일변도의 주거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 사회 변화의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하면서 인구의 절반이 아파트 공화국의 유폐자인 한, 시민사회를 이야기하고 노동 계급을 말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를 물은 바 있다. 이어서 문제의 핵심이 아파트라는 공동 주거 형태 자체에 있기보다는 아파트 '단지'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덧붙인 마지막 말은 단독 주택이냐 공동 주택이냐가 아니다. 동네를 향해 열린 주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했다. 단지는 높은 담장이나 방음벽이 만든 내 삶의 껍데기다. 껍데기를 벗는 일이 바로 탈피고, 탈피는 생명의 진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일이다. 껍데기는 가라!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책_을 펴내며2013.07.17 22:32

프레시안 [우더잘] 토크 정리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1025161326&Section=03

 

국토경제신문 http://www.lenews.co.kr/newsdb/newsread.asp?uid=28816&page=1&branch=1111100

 

프레시안 [장석준 칼럼] 단지형 아파트에서 벗어나는 혁명 http://m.pressian.com/article.asp?article_num=50130731222238

 

노컷뉴스 [신간 소개] 아파트-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566336

 

경향신문 [책과 삶-“아파트 단지가 문제… 공공성 아닌 집단이익 추구로 민주·평등화 제약”]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62134175&code=900308

 

시사인 라이브 [책꽂이_아파트단지의 자폐문화]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7209

 

한겨레신문 [문화] "공동체 붕괴,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 때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95048.html

 

데일리 포커스 [곽명동 기자의 책갈피] 관리비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아파트단지] http://www.fnn.co.kr/content.asp?aid=28231e2e95844b87ae9f8c25d1b02f8d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932.html

 

경향신문 [책과 삶]공적 냉소·사적 정열의 과잉 공간 아파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52025575&code=900308

 

부산일보 [문화] 초고층화 아파트에 대한 인문학적 비판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090000&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130706000029

 

국민일보 [디자인의 발견]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7411871&code=11171376

 

서울신문 [저자와의 차 한 잔]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130713019002&keyword=저자와의 차 한 잔

 

미디어 다음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720190807674

 

경향신문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오피니언>에 일부 언급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162128315&code=990100

 

'프레시안 books'+정혜윤(CBS PD) 북 토크, "우리 더 잘 살아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1002194852&Section=03

 

시사인 "아파트라는 이름의 사설 오아시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06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책_을 펴내며2013.06.20 14:39

헤아려보니 제 이름 석자를 달고 혼자 끄적여 세상에 내놓았거나 지인들과 더불어 함께 꾸려 빛을 보게 한 책이 벌써 마흔 권이나 됩니다. 스스로 참 많이도 썼다, 하며 자책 하기도 하고, 혼자 괜한 마음으로 우쭐대기도 합니다. 2013년 여름의 복판에 새로 선보인 책은 [아파트]입니다. 부제로는 강준만 선생께서 [한국인 코드]라는 책에서 쓰셨던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한국의 아파트, 아파트단지를 설명하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제 사나흘이 지나면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 책은 친구인 명지대학교 박인석 교수와 약간은 장난 삼아 같은 이름의 책으로 각각 쓰기로 한 것입니다. 장난이 지나쳐 같은 날짜에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내기도 하였답니다. 물론 이 약속은 거의 지켜진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6월 말에 제 책이 나오고 한 주일 정도 뒤에 현암사에서 [아파트로 읽은 한국사회]라는 제목의 책이 친구인 박인석 교수의 이름으로 출간되기 때문입니다.

 

새로 세상에 선보일 책의 '책을 펴내며'는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손길이 더해진 글이지요. 여기서는 전문가들이 손길이 닿기 전 혼자 끄적였던 '책을 펴내며'의 원고를 그대로 옮깁니다. 도서출판 마티와 편집자, 디자이너, 그리고 홍보 담당자 뿐만 아니라 인쇄기를 돌리신 분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아파트>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 권 펴내고자 마음먹은 것은 꽤 여러 해 전이었다. 대학원생들과 주거론혹은 주거문화론따위의 제목으로 내심 마음먹었던 소소한 주제들을 정해 세미나 형식으로 논의를 이어가기도 했고, 때론 크게 결심해 박정희 정권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아파트를 반공이데올로기나 수도건설(首都建設)이라는 안경으로 들여다보기도 했다. 또 그 방법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일제강점기의 여성잡지로부터 소설이나 광고 혹은 모델하우스를 통해 아파트(단지)를 들여다보거나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의 구술기록과 전작(全作) 혹은 다른 작가들의 수려한 문장을 돌려 읽으며 서울이라는 도시공간과 아파트라는 건축유형을 소설로 따라 읽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문득 갖게 된 생각들을 추슬러 논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는데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힘입은 바 크다.

 

사실 아파트가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의 구체적 탐구 주제나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적어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건축학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건축학적 관심도 대부분의 경우는 인상비평이나 현상을 좇는 일에 머물렀고 비판적 시선이나 성찰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문화론자들의 반론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건축 내적인 논리와 시선이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점도 무력감을 가중시켰다. 아파트에 관해 여전히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사회적 파장이나 공감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의 확산에 대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자는 논조나 주장은 대부분 문화론자들의 자기 위안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90년대 말을 거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며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건축학과 주거학 분야를 중심으로 과거와는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파편적이었던 기초 자료들을 모으고 이를 사회공간이나 일상공간의 문제로 엮어내는 크고 작은 연구 작업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지성의 힘과 형식을 빌려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법 논쟁도 있었고, 방대한 성과들이 대중성을 갖추며 서점가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작업 역시 연구의 태도와 학자들의 언어로 갈무리된 까닭에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도, 연구 성과가 책으로 꾸며져 서점가에 등장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파트에 대한 경험의 총량이 커졌고 그만큼 권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건축학이나 주거학 이외 분야에서의 관심 때문이다. 사회학이나 정책학 혹은 경제학이나 신문방송학을 기반으로 하는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 작업을 대중적 언어로 번역해낸 작업들은 건축학 분야에서 오랜 기간 몸을 부리고 있는 필자를 당혹스럽게 했고, 자괴감에 빠지게 하기도 했다. 물론 변명에 가까운 이유를 들어 건축학이나 주거학의 연구 성과에 관심을 두지 않은 언론이나 독자들을 탓하기도 했고, 다른 이들의 아파트에 관한 연구 성과와 생각들을 애써 가벼운 것이라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 탓이요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할 도리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을 짧은 글로 정리해두었고 오랜 기간 동안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의 여러 국면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글쓰기를 함께 했던 공동주택연구회의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 컴퓨터의 폴더와 파일이 제법 쌓였고 몇 가지에 주목한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런 생각의 일단을 정리한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던 35년 전에 서울시민아파트를 졸업논문의 주제로 삼은 바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 줄곧 주택 혹은 주거학이나 주거문화론이라는 영역에 몸을 의지한 삶을 계속하였다. 지금은 조금 성격이 달라졌지만 한 동안 우리나라의 주택문제를 연구의 주제와 대상으로 삼았던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에서 12년 이상을 연구에만 매달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주거론과 주거문화론을 중심으로 하는 강의와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고, 그 덕택인지 몰라도 여러 곳에 불려갈 때면 늘 아파트 전문가라는 호칭을 빌어 필자를 소개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다.

 

주택연구소에서의 연구실 경험은 밥벌이 수단이라는 현실적 이유 이외에도 본격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제는 보편적 도시주택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연구소의 동료들이자 지금은 공동주택연구회의 회원으로서 여전히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동학들의 조언과 생각의 나눔은 이 책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이들과 함께 한 연구 성과나 생각의 공유점을 이 책에 담은 것도 그들과 생각을 나누고 합의하거나 공유하는 과정을 오랜 기간 거쳤기 때문이다.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부제로 쓰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은 강준만 선생의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국인 코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선생의 책을 읽다가 문득 이 말이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원고를 쓰는 도중에 선생께 책의 부제로 선생이 책에서 쓴 글을 사용할 것을 조심스럽게 청해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멋진 글을 쓰라는 격려 말씀과 함께 글의 부제에 당신의 글을 사용할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파트>는 건축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이나 연구자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 대중을 독자로 상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분하지 않을 수 있고 때론 너무 전문적이랄 수 있는 건축학적 용어가 난무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원고지를 채워가는 동네 이웃들에게 마치 강의라도 하는듯한 태도를 유지하자는 생각을 잃지 않고 원고지를 채워 나갔다. 편집자와 원고를 주고받으면서 내내 책망 아닌 책망을 들은 것도 글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좀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여러 조언들을 경청하면서 내심 쉬운 글로 풀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편집자의 태도에 대해 충분한 만족을 드리지 못한 점은 전적으로 내 글쓰기의 재주 없음에 그 탓이 있다.

 

글을 이어가며 아파트에 살았던 지난 25년의 거주 경험은 큰 힘이 되었다. 지금은 도시 언저리 야트막한 언덕에 조그만 땅을 마련해 소위 땅집 생활을 하는 입장이어서 아파트에서의 삶과 마당이 딸린 집에서의 실제 경험을 비교해가며 글을 쓰고자 했다. 물론 아파트(단지)는 나쁜 집이고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야말로 좋은 집이라는 이분법적인 편견은 되도록 가지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글을 지었다. 아파트에서 살구나무집으로 불리는 지금의 집으로 옮기는 과정을 그린 <아파트와 바꾼 집>에서도 누차 힘주어 말했듯 좋고 나쁨의 순진한 이분법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책의 부제가 이미 아파트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굳이 아파트의 좋은 점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한 것이 이 책에 담긴 진심이다.

 

<아파트>는 두 가지 차원에 주목하여 꾸린 책이다. 하나는 단지(團地)’로 불리는 공간 조직의 단위이고, 다른 하나는 전용공간(專用空間)’으로 대표되는 아파트의 가족 단위 생활공간이다. 어차피 아파트를 대상으로 쓰인 글은 발에 치일 정도여서 책을 통해 다룰 주제나 논제를 가급적 좁히려고 노력했고,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담은 모든 글의 꼭지는 이 두 가지 논제에 수렴되도록 의도하였다. 그러니 아파트라는 거대한 대상을 너무 좁혀 들여다본, 마치 눈이 어두운 사람이 코끼리 만지듯 한 꼴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아파트 문제를 나열하는 것 또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할 수 있다는 노파심과 함께 차고도 넘치는 아파트를 다룬 책에 한 권을 더 얹는 경우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해 상황을 간결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선택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가급적이면 많은 각주를 달아 속내에 호기심을 느낄 독자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것을 권하였다.

 

책은 모두 10개의 꼭지로 구성하였다. 맨 앞자리에는 대중소설에 묘사된 아파트단지의 여러 층위와 국면들에 대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거칠게 옮겨 아파트단지 생활의 일단을 까칠하게 생각해보자고 권했고, 맨 끄트머리에는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필자가 가진 생각의 갈피를 정리하였다. 이를테면, 논문이라 한다면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사이에 들어간 8개의 꼭지는 다시 둘로 나뉘도록 의도하였다.

 

8개의 꼭지 가운데 앞자리를 차지한 4개 주제는 아파트라는 용어와 용례의 역사적 변천 과정으로부터 아파트와 중산층의 등식이 성립되는 과정을 훑어보면서 단지전용공간이라는 쟁점으로 독자들이 집중하도록 의도하였다. 이어지는 4개의 주제는 단지, 모델하우스, 발코니, 아파트 평면의 구성 원리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내부에 존재하는 논리와 그 논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복합적인 구조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니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례를 따라 읽어도 좋을 것이고, 아무 곳이나 펼쳐지는 곳만 따로 떼어 읽어도 되도록 만들어진 셈이다. 물론 책을 지은이로서는 앞에서부터 차례를 밟아 마지막 쪽까지 이어가기를 바라지만 꼭 그렇게 할 수고를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원고를 쓰는 과정에 많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책으로 꾸리는 과정에서도 역시 다른 전문가들의 손길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20년 이상 만남을 재촉하고 때론 진지하게 또 때론 낄낄거리면서 아파트의 일상과 단지공간에 대한 의견을 나눈 공동주택연구회의 회원들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궁금하거나 미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한 주제들에 대해 동학들의 진지한 해석과 조언은 필자의 생각을 고치고 다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과 더불어 썼던 논문 몇 편이 이 책의 커다란 줄거리를 구성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이들에게 받았던 만큼 이상의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대학원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난 수년 동안 서울의 주거문화연구’, ‘한국공동주택계획사’, ‘하우징 디자인론등의 세미나 과정을 통해 필자가 궁금하게 생각한 사실과 상황에 대해 믿을만한 자료를 찾아주었고, 책에 담긴 도면과 통계자료들도 만들고 확인해주었다.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다독였던 사탕발림이 그들에게 엄연한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적지 않다.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urban_lab은 편집자와 더불어 이 책의 최초 독자가 되었다. 아니 최초 독자라기보다는 초고의 검열자라 불러야 마땅할 정도로 글쓰기 과정의 조언자로서 제 몫을 다 해 주었다. 꼭지마다 채 원고를 마무리하기 전에 글에 담아야 할 몇 가지 구체적 사실 확인이 필요할 때면 도움을 청했고, 언제나 웃는 낯으로(사실은 트위터의 DM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용기를 북돋는 이모티콘으로) 어려운 청을 선뜻 들어주었다. 이와 함께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원고를 읽은 독자로서의 느낌을 매우 조심스러운 투의 글로 되돌려주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법률조항과 사실 확인이 제법 재미를 갖는 글로 읽히게 되었다. 따뜻한 감사의 말을 이 자리를 빌려 전해야 마땅하고 당연하다.

 

출판계약을 한 후 거의 3년이 되도록 초고조차 받지 못했던 도서출판 마티에는 마음의 빚을 크게 졌다. A4 용지 한 장에 끄적거린 책의 대강을 읽은 다음 날 출판계약서를 들고 연구실을 찾은 정희경 대표의 열성과 오랜 기다림 그리고 원고를 책으로 번역하는 재능은 감히 필자가 따라 할 수 없는 부러운 능력이다. 거칠고 딱딱한 글이 제법 읽을 만한 꾸러미로 거듭난 것은 전적으로 도서출판 마티의 여러 사람들 덕이다. 교정과 교열, 편집과 디자인, 제작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성심으로 함께 한 마티의 모든 실무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살구나무 아랫집에서

박철수

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책_을 읽다가2013.05.20 16:39

일본 삼성당에서 기획, 출판한 <한 단어 사전> 20권 가운데 한 권인 이 책은 일본에서 현재 사용하는 '문화'라는 단어가 다이쇼 시기에 독일어 쿨투어 Kultur의 번역어로서 성립했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문화'라는 단어가 존재했었고, 그 연원은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문치교화의 정치이념이었음을 밝히면서 문화라는 단어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마침 그 단어는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 역시 모호하거나 애매한 의미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살필 자료라 판단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익숙한 '문화주택'이나 '문화생활'의 의미도 따져 볼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기도 하다. 

 

문화라는 말은 다이쇼 시기 저널리즘이나 정치가에서 문화생활, ’문화학원, ’문화냄비, ’문화만주(饅頭) 등 일반 민중의 생활 속으로도 전파되어 간다. 여기서는 그중 하나인 문화주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건축학자인 니시야마 우조(西山卬三/1911~1994)<일본의 주거>(勁草書房, 1976)에 따르면 1920년에 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기념하는 박람회가 도쿄에서 열렸을 때 건축업자들이 모델하우스를 늘어세우고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빨간 기와, 유리창, 흰 커튼 등 서양풍을 도입한 일식·양식 절충의 집은 큰 인기를 끌어 문화주택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왜 문화였을까.

 

건축학회에서도 같은 해 건축과 문화생활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고 있다. 그 내용이 <건축잡지>(416, 19216)에 게재되어 있는데, 개회사에서 학회 회장인 도쿄제국대학 명예교수 나카무라 다스타로(中村達太郞/1860~194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테마를 건축과 생활개선으로 할 예정이었지만 건축과 문화생활로 바꿨다. “문화주의에 의거해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문화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예전 적국이었던 독일에 대해서도 학술상 우리는 경모하고 있습니다. 역시 독일의 문화가 세계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이 강연회에서는 건축학자들 뿐만 아니라 도쿄 시장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857~1929), 정치학자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 등도 강연을 했는데, 니시야마 우조가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하고 있듯이 거의 모든 사람이 문화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문화를 왜 정면에 내걸었을까. 그 사정은 일본의 번역어 일반에 해당되는 현상으로 왠지 고급스런 어감이나 효과 때문인데, 이것을 의식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회장인 나카무라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듯이 역시 독일의 문화가 세계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주택은 당시의 중류, 인텔리 계급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양관(洋館)이라는 것은 한 시대 전인 메이지 시기에서 이른 바 상류계급의 주거인 반면에, ‘문화주택이라는 것은 양관보다는 좀 작지만 응접실과 넓은 거실, 독방을 갖추고 있어 가장(家長)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생활도 중시하는 서양풍의 근대적인 주거이다. 이 주택은 시대의 풍조를 타고 도쿄에서 오사카(大阪), 고베(神戶)로 확산되고, 이윽고 일본의 전 도시로 보급되어 갔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아파트먼트 하우스가 활발하게 건설되자 그 영향을 받아 모리모토 고키치(森本厚吉/1877~1950)1922년에 아파트 건축을 추진하는 문화보급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1925년에 간다(神田) 오차노미즈()에 서양풍의 문화 아파트먼트가 건설되었다. 미국에서 건너 온 문화였지만 역시 문화로 불리고 있다. 아파트가 당시의 서민들에게는 약간 사치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이후 주택의 수요에 부응해 많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2차 세계대전 후 패전으로 가난해진 일본에서 도시의 건축은 아파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을 오사카·고베 지구에서는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전쟁 전의 호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지만 경제 성장과 더불어 아파트는 그 가치가 급속히 떨어져 저소득자용 주택으로 전락해 갔다. 그러다가 아파트문화의 호칭이 분화되어 아파트는 설비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집합주거로 기친(木賃) 아파트로도 불리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분카(ブンカ)’라고도 쓰이며 집집마다 화장실과 부엌이 있는 한 단계 위의 아파트를 지칭하게 되었다.

 

from 야나부 아키라(柳父章) 지음, 박양신 옮김, [한 단어 사전, 문화], 서울, 푸른역사, 20134(초판 1), 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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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구아저씨 살구아저씨
살구나무집_생각2013.01.08 22:46

2013년 1월 8일 화요일 저녁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던 중에 '건축물 범죄예방설계 가이드라인, 1월 9일부터 시행'이라는 텔레비전 화면 하단을 흐르는 자막뉴스를 보았다. 달포 전에 친구들로부터 이와 관련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틀었던 터여서 서둘러 인터넷을 뒤져 국토해양부의 보도자료를 확인하였다.

 

http://www.mltm.go.kr/USR/NEWS/m_71/dtl.jsp?lcmspage=1&id=95071560

 

그리고는 염려와 걱정을 앞세워 트위터를 통해 "국토부의 '건축물 범죄예방설계 가이드라인'은 공동주택의 경우 '단지'와 '도시'를 물리적, 시각적으로 구분하는 조치로서 열린 사회에 반하는 것입니다. 사회안전망의 구축이 우선입니다."라는 의견을 올리고 <아파트와 바꾼 집>을 함께 지은 친구와 몇 명의 동학들에게 메일을 보내 국토해양부 보도자료를 한 번 읽을 것을 권하였다. 우리는 함께 어울릴 때마다 '단지화 전략'을 더불어 걱정했고 '단지 해체'야말로 우리나라 사회공간 구조를 혁신하는 일이라 믿고 있었기에 이번 국토부의 조치는 극히 우려되는 일로 여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지은 책의 일부를 다시 살펴보았다. 소위 '단지화전략'을 비판한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런 판단 없이 쉽사리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 아파트단지의 공간구조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보자는 뜻으로 <아파트와 바꾼 집>의 앞 부분 몇 쪽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대한민국은 아파트공화국?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공화국》(후마니타스, 2007)이 출간된 이후 ‘공화국’이라는 꼬리말이 붙은 책들이 출판가에 여럿 선을 보였다. 《룸살롱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1)이니 《검찰공화국 대한민국》(김희수 외, 삼인, 2011)이니 하는 이름의 책들이 출간되는가 싶더니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기의 신산스러움과 팍팍함을 포착한 《각개약진 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8)에서부터 부동산을 통해 우리 사회를 해부한다는 《투기공화국의 풍경》(이태경, 한국학술정보, 2009)에 이르기까지 제목을 헤아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심지어 《과학공화국 화학법정》(정완상, 자음과모음, 2007)이라거나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김용만, 자음과모음, 2010) 등의 이름을 단 학습 시리즈물이 나오기도 하였고, 아파트 단지의 입주자 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가 가지고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한 남용을 비꼬아 “힐캐슬 공화국”(http://cafe.daum.net/inchonfirstcity)이라고 비난하는 블로그 포스팅도 발견할 수 있다.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공화국》은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유별나게 많다는 사실과 서구 사회와는 달리 절대적 주택부족 현상이 해소된 지금도 여전히 아파트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면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행사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서이다. 이와 유사한 연구서나 글도 많지만 대부분 아파트 평수 늘리기가 인생의 목표이고 아파트 평수로 줄을 세우는 한국 사회를 통탄하거나 아파트 브랜드와 위치, 평수가 구별 짓기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현상을 문제 삼아 ‘아파트의 노예가 된 한국인’이라고 자학하는 대책 없는 자아비판들이다. 이러한 자아비판은 주택시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아파트’라고 몰아세우는 과장된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주택이 중요한 재산이 아닌 사회가 있는가. 아파트가 많아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아파트가 많은 것이 문제라면 전 국민의 90% 정도가 정부기구인 주택청(HDB)이 공급하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싱가포르나 아파트 도시국가로 불러 마땅한 홍콩의 경우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파트 문제’는 다시 물어야 한다. 아파트가 많다는 것이 갖는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아파트가 한 해에 지어지는 주택 총량의 7할을 웃돈다는 것이 문제적 현상이라면 그 문제는 무엇인가 말이다. 아파트가 단독주택으로 바뀐다면 사람들은 평수에 집착하지 않을까. 주택을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고 주택으로 재테크를 하지 않게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머리가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아파트공화국’이라는 말은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근원 내지는 해결 방향의 실마리를 짚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아파트로 획일화된 주거유형이 문제라는 점에 고개를 주억거린 정책 입안자들은 주거유형 다양화를 정책 목표로 설정하면서 타운하우스나 블록형 단독주택을 외치는가 하면 도시형 생활주택의 공급을 늘려 문제 상황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그들의 생각은 아파트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을 낮추면 되는가. 타운하우스 짓기를 독려하고 공공의 택지개발과정에서 단독주택 용지를 늘리면 만사 해결되는가. 그렇다면 밀도는? 아파트 건설로 얻어지는 좁은 땅에 많은 집짓기 효과를 타운하우스나 단독주택이 과연 대체할 수 있는가. 또 주택 가격은?

 

이제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이라는 광고 문안은 결국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의식 개혁이 필요하다고 꾸짖는 일과 다름 아니다. 이를 좀 더 세련되게 바꾸어 말하면 ‘소유에서 거주로의 주거개념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임대주택 공급 확대라는 답이 나올 것이 뻔하다. 임대주택은 아파트 아닌 다른 주거유형을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파트가 많다는 현상을 문제 삼았으나 해결 방향은 엉뚱하게 흘렀다. 아파트와 관계없는 다른 문제로 변질된 것이다. 결국 ‘아파트공화국’이라는 상징 조어는 부정확한 문제 진단인 셈이다.

 

단지공화국

 

‘아파트’는 핵심 문제가 아니다. ‘아파트 단지’가 문제인 것이다. ‘단지’를 쟁점으로 삼을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선명해진다.

 

다시 묻자.

 

환금성과 편리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파트’인가. 아니다. 미안하게도 그건 ‘아파트 단지’다.

 

인기 있는 것이 ‘브랜드 아파트’인가. 아니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브랜드 아파트 단지’다.

 

단지라야 화폐 교환가치 유지가 용이하고 환금성이 좋다. 둘러친 담장 안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편리성이 보장된다. 단지는 크면 클수록 좋겠다. 소위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되면 생활의 윤택 정도가 높아진다는 착시 현상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단지(團地)’를 뜻풀이하면 ‘필지(筆地)들의 모임(團)’이다. 재개발아파트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따라 크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이 소위 재개발사업지구로 지정되고 한참이 지나고 나면 엄청난 높이의 타워크레인들과 함께 초고층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선다. 그러나 바뀐 것은 건물 모습만이 아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던 자잘한 땅들에 붙었던 번지수와 호수는 이제 찾을 길이 없고 담장이나 방음벽으로 둘러쳐진 거대한 사설 오아시스인 단지는 단 하나의 번지수를 갖는다. 작은 필지들이 모여 단지가 된 것이다.

 

‘아파트 단지’는 정부가 주도한 ‘단지화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짧은 기간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취약한 도시기반시설을 단기간에 보충하고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의 고급 취향에 맞는 살림집을 효과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채택한 ‘단지형 주택공급 정책’을 시행해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단지의 크기와 그 안에 들어가 살 사람들의 수에 따라 놀이터와 공원에서부터 주차장, 노인정이나 운동시설을 주택 공급 주체가 의무적으로 채워 넣도록 하였다. 물론 비용은 모두 입주자 부담이다. 아파트 분양가에 그 비용이 모두 반영되어 있다. 도시기반시설이 형편없는 단지 밖 동네 주민들이 자칫 단지 안 시설 이용으로 불편을 초래할지 모르므로 단지 안팎을 구분하는 담장이 설치된다. 단지는 결국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아니 사막 속에 저 혼자 푸르른 오아시스가 된다. 자기 돈 주고 마련한 저만의 오아시스.

 

집값에 더해 생활편의시설 비용까지를 모두 부담할 수 있는 계층이 아파트 단지로 몰렸다. 이른바 ‘단지족’의 탄생이다. 정부는 손도 안대고 코를 푼 격의 정책적 성공을 구가한다. 공공투자 한 푼 없이 생활편의시설을 갖춘 주거단지들이 속속 들어섰다. 게다가 아파트 분양에 목 맨 수요자들이 재산을 몽땅 털어 넣은 덕에 조국 근대화의 역군 건설 산업이 저절로 자라났다. 주택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건설업체는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만들며 몸집 부풀리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시는 ‘아파트 단지의 군도(群島)’ 혹은 단지들의 물리적 집합체에 불과한 ‘단지 도시’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단지’를 두고 벌이는 형용어 사용의 차이다. 정책입안자나 주택공급주체들은 ‘단지’ 앞에 하나같이 ‘자족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생활의 편리에 방점을 찍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자폐적’이니 ‘폐쇄적’이니 ‘내향적’이니 하는,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를 ‘단지’의 형용어로 사용한다. 지지와 비판의 차이로 보아 그르지 않다. ‘아파트’ 문제가 ‘단지’ 문제로 옮겨가는 중요한 대목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단지’다. 이제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단지’의 공간 구조적 특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독주택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일터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떠올려 보자.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리면 아파트 단지의 경우는 방음벽이나 담장을 빙 돌아 주출입구(요즘은 이를 게이트라 한다)를 통과한 다음 단지 입주자들만 다니는 호젓한 길을 걸어 동호수를 찾아 계단을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에 다다른 뒤 집 안으로 들어간다. 단독주택의 경우는 이와 달리 차에서 내려 대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을 따라 걷다가 대문을 열고 뜰을 건너 방으로 드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두 가지 경로가 어떻게 다른가. 누구나 거리낄 것 없이 나다닐 수 있는 길에서 바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단독주택이라면 아파트 단지는 그렇지 않다. 단독주택은 소위 공공영역과 개인영역이 맞닿아 있는 공간 구조이자 집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로 다양한 반면에 단지형 아파트는 공공영역-공유(共有)영역-개인영역의 순차적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고 집에 이르는 경로 역시 하나 뿐이라는 차이가 있다. 아파트 단지가 자족적 생활결사체들의 병렬조직이라면 단독주택은 개방적 생활공간의 유기조직인 것이다.

 

단독주택이 열린사회의 공간 구조를 가지는 것이라면 아파트 단지는 닫힌 사회가 될 터이다. 이동 경로가 단순한 아파트 단지가 지루하고 심심한 표준적 생활공간이라면 단독주택은 경로의 선택에 따라 풍경이 바뀌고, 다채로운 개인 생활이 밖으로 드러나는 다원적 생활공간이다. 아파트가 획일적이라는 지적은 주거동의 모양이 똑같다는 점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에서의 생활이 단조롭고 무료한 것이어서 삶의 활력을 갖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획일적’이라는 말을 단순히 모양이 같아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은 그 말의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설픈 진단에 불과하다.

 

‘단지’는 아파트에 국한하지 않는다. ‘연립주택 단지’도 단지이며, ‘타운하우스 단지’ 역시 높은 담장이나 옹벽을 두른 단지이기는 마찬가지다. ‘블록형 단독주택’은 또 어떤가. 이름에 쓰인 그대로 역시 담장을 빙 둘러 ‘단독주택단지’로 만들어진다. 아파트만을 문제 삼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국사회의 주거유형과 생활공간 구조에서 문제적 상황은 ‘아파트’가 아니라 ‘단지’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일은 아파트단지가 아닌 사회공간에서 삶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보편화 시키는 일이다. 삶의 형식과 내용을 피동적인 것으로부터 능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이며, 표준적이고 균질적인 '단지형' 사회에서 차이를 존중하고 남을 배려하는 '열린' 사회공간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사회적 담화공간인 길의 회복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북돋우는 사회운동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국토부의 이번 조치가 그동안의 닫힌 사회를 더욱 굳게 닫아 걸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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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집_생각2012.08.09 20:47

‘백약이 무효’라는 말은 요즘 부동산 정책 입안자들이 자조하는 말이다. 냉담한 시장은 자신도 그 효능을 자신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를 원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그나마 지닌 몸의 면역력을 아주 상실할 것이 염려되는 까닭에 정책입안자들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도리가 없는 형국이다.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잘 알려진 처방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뿐이다. 어렵사리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를 내놓으니 빚 늘려 은행이자 갚으라는 얘기냐는 비난에 직면하고, 내수 경기 활성화를 위한다는 뜻에서 몇 가지 생각했던 감세 조치 등을 발표했더니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골프장 사업자 걱정이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은행은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되는 집 값 하락으로 인해 담보가치인정비율(LTV)이 높아지자 이자는커녕 원금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정부는 가계대출에 대한 은행간 CD금리 담합 의혹을 제기하면서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진 이유가 은행의 높은 이자율 때문이라면서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대책 없는 책임전가가 진흙탕 싸움과 다를 것이 없다.

 

소위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하우스 푸어’ 중에는 부동산 불패 신화를 믿고 고집하면서 집값 앙등을 노리고 자금을 끌어다 댄 투기꾼이 없지 않겠지만 열심히 주어진 일과 세상을 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도 보도 못했던 ‘하우스 푸어’에 속하고 만 경우도 적지 않다. 약삭빠르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오늘도 빚 걱정에 한숨이 턱에 차오른다. 열심히 일터에 나가 월급 받아 알뜰살뜰 모아 집을 장만하려고 한 것이 죄가 되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세상을 탓하지만 약삭빠르지 못했다는 주위의 핀잔 때문에 그 궁극은 자기 모멸감으로 되돌아온다. 좁은 집에서 살다 조금 넓은 집으로 늘려가려던 애틋한 소망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하우스 푸어’라 싸잡아 비난하는 일에는 세상이 야속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까지 모리배나 투기꾼으로 뭉뚱그려 낙인을 찍고 비난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하우스 푸어’에 대한 일방적 편견을 잠시 거두고 상황을 살펴보며 대안을 찾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될 터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공공정책이다. 집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주거권의 토대이고,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보장되는 나라라면 공공정책이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래야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지혜를 모아 민심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그동안의 처방이 효과가 없었다면 다른 대안 찾기에 나서야 한다. 그저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의 임시방편이거나 자본과 시장 분위기에 눌려 좌지우지되는 남의 다리 긁는 식의 종합 처방이 아니라 병증(病症)의 원인을 제대로 짚고 구조적이며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안전망과 건전성, 나아가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강화하기 위한 부동산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기금이나 국민주택기금 등과 같은 목적형 정책기금, 혹은 공공기관의 매입임대 사업 예산 등을 이용해 문제가 되고 있는 거래 정체 현상의 물꼬를 트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다. 공무원연금이나 재건축 사업 대상이 되는 공무원임대아파트 등 공공임대주택의 매각 기금의 일부와 국민주택기금 등 부동산 관련 기금 그리고 공공기관의 매임 임대주택 관련 예산을 종자돈으로 하고 시중에 차고 넘친다는 유휴 민간 자금을 활용해 정체 현상을 빚고 있는 시장의 매매 대기 주택을 매집하여 공적 목적으로 비축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이를 전문으로 하는 제3섹터의 조직이나 특수목적법인을 새로 설립할 수 있다.

 

‘다세대주택’, ‘연립주택’, ‘아파트’ 등 공동주택을 우선 비축대상 주택으로 삼되 향후 정책적 효과를 보아가며 확대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즉시 사용(입주) 가능한 국민주택규모 이하를 1순위로, 그렇지 않은 경우를 2순위로 삼는다면 서민과 중간층을 위한 정책이라는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다. 당연히 민간건설업체의 미분양 아파트 등은 비축대상에서 제외한다. 비축대상 주택의 우선순위와 매수대상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급증하고 있는 ‘베이비부머’들이 소유하고 있는 주택을 전세나 월세 등으로 전환하기 위한 주택매집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비축 대상주택의 매입가격은 재산세 부과의 기본이 되는 공시가격을 최저가로 하고 비축대상 주택의 부동산 거래 신고서를 통해 세무당국에 신고한 가격을 최고가로 하는 범위 안에서 공정한 감정평가사의 평가 결과를 참고하는 협의 매수방식을 택한다. 결국 주택소유자의 입장에서는 손절매(損折賣)라는 탈출구를 갖게 되는 셈인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적어도 당분간은 공시가격 이하로 집값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정책적 신뢰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투기꾼과 실제 ‘하우스 푸어’를 구분하는 실효성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전국에서 매집된 비축 주택은 전세가격 안정 등을 위한 공공 및 민간 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신규 주택구입 희망자에게 매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소유권 이전이 완료되는 매도 시기는 임차계약이 완료되는 시점에 맞추면 세입자와 소유자 사이의 분쟁이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으며, 공공이 비축한 주택을 매입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중개수수료 면제와 더불어 일정 비율의 취등록세 감면 조치를 통해 거래활성화를 제도적으로 지원한다. 소유주택을 전세 등 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경우에는 임대차보호법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거주자의 계속 거주권을 보장하는 방법도 동원할 수 있다. 비축주택 매입 가격 대비 매도 가격이 높을 경우 발생하는 차익에 대해서는 주택 비축에 종자돈이 된 공공기금이나 민간 유휴자금의 투자 이익으로 계상하거나 배당하고 이익에 대한 일정한 세금 감면조치를 더불어 취하면 될 터이다.

 

이 방법은 그동안 반복을 거듭했던 규제 완화나 감세 조치와는 아주 다른 방법일 수 있으며 정책적 목표 이외의 다양한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은 거래 정지 수준에 머물고 있는 서민과 중산층의 주택거래 활성화에 기여해 자금 흐름의 차단 현상을 상당부분 해소함으로써 높은 이자 부담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하우스 푸어’들의 걱정거리를 줄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연기금의 공적 활용이라는 대의와 명분을 얻을 수 있는 동시에 시중의 부동자금을 건전한 투자처로 유인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택과 관련한 사회적 갈등의 일정 부분을 완화하거나 해소함으로써 경제계층의 자연스런 이동 효과를 도모할 수 있다. 또한 불안정한 전세가격의 안정에 기여함은 물론 전국적으로 다양한 규모의 공공 임대주택을 비축함으로써 노령화와 가구구성 변화에 공공의 정책적 대응력을 높이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미분양주택의 판매와 신축 아파트의 입주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건설경기 활성화에 긍정적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실수요자와 투기꾼을 자연스럽게 구분함으로써 정책적 수혜 대상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공공정책의 순기능에 부합하는 일이다. 물론 부동산 거래 활성화로 조세 수입 증가가 기대될 뿐만 아니라 안정적 주거공급을 통한 내수시장 활성화에도 적지 않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식되고 있는 현재의 ‘하우스 푸어’에 대한 오해 혹은 편견이 해소됨으로써 경제계층 상승을 위한 안정적인 사다리를 제공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나아가 조기 퇴역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소유주택을 임대주택으로 전화함으로써 그들의 경제활동 유인력을 제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아이디어는 현재의 집값이 미약하게나마 상승하거나 적어도 보합세가 유지되거나 한다는 점을 가정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동산 가격 하락이 지속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 마련 역시 준비되어야 한다. 부동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는 가정은 단순히 부동산 정책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수(稅收)의 대폭 감축과 함께 중간층의 급격한 붕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므로 어차피 준비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다른 정책과의 연계를 통해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공적 연기금의 손실 보전방안이나 투자자금의 손해 발생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대책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미리 준비되어야 할 정책적 틀은 부동산 가격의 단기 폭락보다는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가격 하락을 정책적으로 유인해야 한다는 상황에 대한 공감이며 이를 위해 정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방안도 매뉴얼 형식으로 마련해두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부동산 가격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론적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간극을 줄이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구체적인 상황의 해소 방안을 가지고 논쟁하고 토론하고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 원론적 주장의 대립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많은 ‘하우스 푸어’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주장을 들이대면서 정치적 선명성을 구분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아직 정쟁의 대상으로 심기에 이른 감이 없지 않다.

 

※ 이 글은 2010년 8월 20일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 “하우스 푸어, 조금은 생뚱맞은 생각”을 보완,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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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을 읽다가2012.06.07 21:27

"세상에는 이혼 안 한 부모와 이혼한 부모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돈 없는 부모와 돈 있는 부모가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즉, 자식에게 아파트를 사줄 수 없는 부모와 사줄 수 있는 부모의 차이뿐이다. 그 차이야말로 자식의 결혼과 장래에 결정적 변수가 된다."

 

from 오현종, [거룩한 속물들], 서울, 문학에디션 뿔, 2010년 5월(1판 5쇄), 61~62쪽

 

인터넷을 통해 연재하던 글을 다시 그러모아 장편소설로 묶은 오현종의 [거룩한 속물들]은 넓게 보아 가족소설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간을 통해 드러낸 제대로의 시선은 우리 모두가 속물이 될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적인 현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속물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20대 속물들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제대로 속물도 못 되는 어설픈 속물에 속하는 우리 모두를 아우르려 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소설의 제목은 김수영 시인의 산문인 <이 거룩한 속물들>에서 따온 것이고, 자본주의 현실의 한복판에 놓인 20대의 젊은이들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이들 20대의 여성들은 각각 돈이 너무 많아 고상한 속물이거나 돈이 너무 없어 비루한 속물이거나 혹은 원래 근본인 속물인 속물로 압축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의 실제 세계는 예외 없이 속물이 되는 생활세계이고, 욕망이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는 점을 힘주고 싶었기에 이들을 등장시킨 것이라 것이라 믿는다. 돈이 이미 계급이라면 외모도 계급이고, 늘 교환의 법칙이 적용되는 현실세계가 속물의 세계라는 것이을 냉철하지만 제법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흥미로운 언급 가운데 하나는 아파트를 두고 이 세상의 부모도 둘로 나누는 '부모의 이분법' 장면이다. 자식에게 아파트를 사 줄 수 없는 부모와 사줄 수 있는 부모의 차이가 결혼과 장래에 결정적 변수가 된다는 서늘한 지적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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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집_일기2012.02.24 00:00
일주일 전 <아파트와 바꾼 집>을 출간한 도서출판 동녘의 이상희 부장으로부터 전해들은 '한경비즈니스'의 살구나무집 사진 자료 요청과 역시 건축가 조남호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들은 바 있는 한경비즈니스 우종국 기자의 인터뷰 기사 내용이 출판사를 통해 PDF 자료로 전달되었다.

전체적인 기사의 논조는 '아파트 가격이 주춤하면서 그동안 마음 속에 품었던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가운에 구본준 기자와 건축가 이현욱이 지은 일명 '땅콩주택'과 함께 '살구나무집'이 기사의 대표 사례로 소개되었다. 더불어 살구나무집을 설계한 건축가 조남호 선생의 일문일답식 인터뷰 자료가 실려 있는 것이었다. 천천히 기사를 읽어보니 통계적으로도 아파트 공급을 위한 사업승인 건수가 줄어드는 반면 최근에는 단독주택 건축허가가 상대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구체적인 유형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일종의 트랜드 보고서 형식의 기사였다.

흥미로운 점은 건축가 조남호의 인터뷰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다. 즉, 보편적 집짓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며, 이를 위해 진지한 건축가들의 참여가 요구되며, 그래야 건축공사비를 낮출 수 있는 자재 등의 규격화가 따라오는 것인데 아직은 이런 일들이 충분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단독주택을 짓는 일이 모든 이들에게 버거운 일로 여겨지고 비용 부담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동의하는 대목이다. 여기 해당 원고를 그대로 싣는다.

이와 더불어 며칠 뒤 집짓기 과정을 담은 한경비즈니스 기사내용이 포털사이트인 네이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아파트와 바꾼 집>을 포함해 몇 권의 책을 참고해 한경의 이홍표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http://magazine.hankyung.com/business/apps/news?popup=0&nid=01&c1=1001&nkey=2012022300847000121&mode=sub_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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