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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와 바꾼 집’ 그 후
박철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살 곳을 바꾼다?
<난문쾌답>이라는 책이 있다. 경제 한파와 고용 불안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피로사회에 어쩔 수 없이 귀속된 많은 직장인들에게 공감을 하게 했다는 광고가 붙은 책이다. 지은이는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 여러 가지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기는 하지만 다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가지다. 경제학자이자 경영인이라는 것. <난문쾌답>은 오마에 겐이치가 ‘비즈니스 브레이크스루(Business Breakthrough)’라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남겼다는 글이나 말을 골라 직원이 오마에봇(@omaebot) 계정을 만들어 트위터를 이용해 알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진 책이다.
<난문쾌답>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라고. 물론 잘 지켜지지 않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하는 작심(作心)을 가장 무의미한 행위라 언급하고 있으니 허탈하기 그지없다. 그가 했다는 말을 천천히 읽으며 다시 곱씹어보자. 스스로를 대입시켜 본다면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오마에 겐이치가 제시한 인간을 바꾸는 방법 3가지를 따로 떼어내 함수 관계나 선후 관계를 따져보자면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이 다른 것에 우선하겠다는 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시간을 달리 쓴다고 해서 사는 곳이 바뀌지는 않으며, 새로 사람을 사귄다 해서 사는 곳이 바뀌지는 않는다. 결국 사는 곳을 바꿔야 새로운 사람을 사귈 가능성이 높아지고, 시간을 달리 쓸 기회를 얻게 되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 바뀌기를 원하거나 다른 이에게 삶을 바꾸라 권고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이 첩경일 것이라는 말과 다름 아닐 것이다. 이민을 갈 수도 있고, 답답하고 복잡한 도회지를 떠나 자연에 나를 맡기고 그 섭리에 의탁하는 새로운 생산의 삶인 귀농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일상이 놓일 지리적 위치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인 곳의 거처가 여전히 ‘아파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울타리를 넘거나 전혀 다른 풍경과 생산 방식이 작동하는 사회에 터를 두고 그동안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새로 꾸릴 요량이더라도 매일 매일의 일상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아파트’가 몸을 누일 거처라면 작심하고 떠나온 곳의 삶과 크게 다를 것이 없겠다. 레디-메이드 인생일 가능성이 높고 인간이 바뀔 개연성도 여전히 봉쇄될 것이 분명하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가 이유 없이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책에서 인용한 글을 현실적이고 다분히 한국적인 상황으로 달리 해석하자면 결국은 장삼이사의 보편적 도시주택으로 불리는 ‘아파트’를 떠나 다른 집으로 거처를 바꾸는 것이 곧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일 수 있겠다. 그래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이어가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일까.
아파트 권태 증후군
‘아파트’에서의 일상은 누구에게나 큰 차이가 없다. 오죽했으면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이외수, <감성사전>)이라고 했을까. 그 안에서 아이들은 ‘22평 친구들’(박민규, <비치보이스>)을 사귀고 부모들은 ‘아파트 평수와 자녀의 석차를 삶의 목표로 삼는 닫힌 사회’(정운찬, ‘국무총리 취임사’에서)에 기꺼이 편입되어 ‘무리지음과 서열화의 정치학’(이영미, <광화문 연가>)을 배우고 익혀 ‘십 억짜리 아파트에 살며 이십억이 안 되니까 안심할 수 없다 엄살떠는 중산층 환자들’(이지민, <타파웨어에 대한 명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아이들 과외공부 시켜 대학까지 보내놓고 나서 빚 없이 강남의 오십 평 아파트에 산다면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박완서, <마흔아홉 살>)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도리질을 해도 정밀하게 짜여 쉼 없이 돌아가는 아파트단지에서의 일상 회로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파트’에 살다 보면 전혀 의도한 적이 없는데 뜬금없이 괴이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살 것인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평일은 평일대로 주말과 휴일은 또 나름의 반복된 규칙이 일상으로 굳어진 습속을 되풀이하다보면 삶에 대한 회의나 권태가 생각이나 행동에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증상은 감지되었지만 원인을 도무지 찾을 수 없고 당연히 치유 방법도 난감할 뿐이다. 일컬어 ‘아파트 권태 증후군’인 것이다. ‘풍뎅이처럼 저마다 제 영역에서만 영일 없이 푸드덕 거리는 요상한 시절에다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짜인 생업’(김원우,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본>) 때문에 빚어지는 마음의 상처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최근 대중들의 관심이 ‘건축’에 쏠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서 열광에 가까운 ‘집짓기’에 관한 관심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생경한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흥행이나 집짓기에 관한 예능 프로그램의 공중파 방영, 일간지를 통한 연속 기획 기사 마련과 서점가에서 전례 없이 지속되는 집짓기 신간의 출간과 관련 서적의 판매 약진 등은 크게 보아 아파트 권태로부터 불거진 일종의 욕망 분출이거나 아파트 권태 증후군에 대한 치유 방식의 서막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특히, <두 남자의 집짓기>는 누적된 아파트 권태 증후군의 새로운 돌파구 구실을 톡톡히 했다. ‘땅부터 인테리어까지 3억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법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머뭇대는 이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준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위 ‘땅콩집’을 통해 ‘살 곳을 바꾼’ 이들은 베이비부머들과는 전혀 다른 사회경제적 환경과 도시문화적 상황을 경험하고 생산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두운 ‘다방’이 아닌 안팎이 공존하는 ‘카페’ 문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며 탁 트인 열린 공간에서 담요를 깔거나 걸치는 일에 익숙한 ‘담요문화’ 세대이다. 아파트와 아파트단지의 절대적 폐쇄를 열린 카페의 개방감으로 치유하고 땅집으로 의식을 확장한 세대이다. 게다가 그들은 주택의 절대적 부족과 그로 인한 부동산 가격 앙등으로 이익을 챙길 가능성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현실 세계에서 알아차린 세대이다. 아파트 되팔기를 통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도, 능력도 없거니와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 시절이 되었음을 이미 몸으로 느낀 세대이다. 그러니 ‘팔기 위해 집을 살’ 까닭이 없고, ‘아파트 권태 증후군’을 스스로 진단하고 ‘아이들에게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살 곳을 바꾼다’는 치유의 방식을 깨달은 의지가 충만한 세대인 것이다.
아파트와 바꾼 집
<아파트와 바꾼 집>을 통해 알려지게 된 ‘살구나무집’은 베이비부머들의 단독주택이다. ‘땅콩집’이 하나의 필지에 두 집이 마당을 함께 쓰며 각자의 집은 수직으로 쌓아 붙여 사는 집인 반면에 ‘살구나무집’은 각각의 땅에 서로의 집을 따로 지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 없는, 흔히 알고 있는 단독주택이다. 다만 다른 단독주택에 비해 다른 점이 있다면 살구나무 윗집과 살구나무 아랫집으로 불리는 두 집의 터가 남북 방향으로 붙어 있고, 건축주가 20년 지기여서 두 집 사이에 경계는 갖추되 트인 풍경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마침 집 터 바깥의 공원부지에 100년은 족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어 자연스럽게 살구나무를 경계로 윗집과 아랫집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된 집이다.
두 집의 남자는 동갑이고 오랜 친구다. 하는 일도 같고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분야도 비슷해 많은 생각이나 주장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동안의 삶이 판에 박은 듯 똑같지는 않지만 집에 관한 한 서로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궤적을 걸어왔다. 그러니 그들이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방식 역시 다른 베이비부머들과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결혼 후 부모의 경제적 보탬 없이 전세로 시작하여 내 집 마련에 온 힘을 쏟아 스스로의 힘으로 아파트를 마련했고, 여러 가지 처지와 상황에 따라 집을 늘리면서 팔고 사기를 거듭해 각각 경기도 분당과 서울 중계동의 40평형대 아파트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베이비부머들과 조금 다를 것을 꼽으라면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아파트를 떠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사는 곳을 옮겼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아파트 권태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과 달리 서둘러 사는 곳을 바꾼 것이다. 둘은 운 좋게도 서로 붙은 터를 따로 구입해 같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건축가가 추천한 시공자를 통해 집을 지어 거의 동시에 새 집으로 이사해 서로 곁을 주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우리 역시 오랜 아파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왔던 아파트에 만족한 적은 없었다. 집이 좁아서도 아니고 직장과의 거리가 문제가 된 적도 거의 없었다. 크기를 늘리거나 이사를 반복해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사는 곳을 바꾸는’ 일에 윗집 친구가 먼저 나섰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기분으로 아랫집이 뒤를 따랐다. 다행인 것은 우리 둘 모두 건축학과 교수로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집짓기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제법 있었고 주변의 도움이나 조언을 힘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건축학과 교수인데 설계를 다른 건축가에게 왜 의뢰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있었고, 돈을 많이 벌었으니 집을 짓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빈정거림과 더불어 나이가 들면 오히려 도심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왜 밖으로 나가느냐는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점잖은 조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강단이나 연구실 책상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장의 다양한 실제를 집을 지으며 직접 몸으로 습득할 수 있었으며 집을 짓기 전부터 새 집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주거건축 전문가로서 가질법한 모든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며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를 거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값진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눠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좋은 집 짓기가 대중적인 사회운동으로 번져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였다. 집짓기 과정의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아야 하고, 확인된 쟁점이나 진실에 대해 여과 없이 알려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마침 출판사에서도 우리들의 뜻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집짓기의 모든 것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기로 한 것이다. <아파트와 바꾼 집>이다.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
<아파트와 바꾼 집>은 ‘좋은 집’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의도한 책이다. 살구나무집을 지으면서 분명한 답을 얻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 궁리를 거듭할 수 있었고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럴 것이라 여겼던 어렴풋한 추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분명한 논거를 가질 수 있었고, 저잣거리의 소문이 만들어낸 가공된 진실에 대해 증거를 들이대면서 핏대를 높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돈의 문제에 대해서는 1원 단위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밝혀 아파트와 비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파트는 나쁜 집이고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야말로 좋은 집이라는 순진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경계하였다. 아파트건 단독주택이건 좋은 집이 많이 만들어져야 삶이 풍요롭다는 공동선에 대해 일갈한 것에 불과하다.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지만.
흥미로운 주장은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제법 정리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집이란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철학자들의 귀한 글귀를 주워섬길 것도 없다. 그저 사는 이들에게 마음의 풍요를 주고 한 곳에 오래 머물도록 권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살구나무집을 지으며 우리가 공감한 좋은 집이란 ‘보통 수준의 공사비로 지은 건실하고 품격 갖춘 집’이다.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비싸지 않은 집’이다. 보통 수준의 공사비로 지을 수 있는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수준이라니?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리라. 보통 수준이라면 말 그대로 중간 수준이다. 집장사집의 통상 공사비와 건축가들의 작품주택에 드는 공사비의 중간을 이른다. 여러 가지 자료를 살피고 들여다본 결과 흔히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집장사 집에 드는 평당 공사비의 150% 이상이고, 유명건축가들의 작품주택에 드는 비용의 70% 정도라면 보통 수준으로 얘기할 수 있고, 국토해양부에서 매년 고시하는 고급 연립주택이나 테라스 하우스의 평당 건축공사비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야 아파트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냉난방비 걱정 없이 따뜻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집’이다. 흔히 얘기하는 실용적인 집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로(結露), 누수(漏水)로 대표되는 각종 하자(瑕疵)와 부실한 설계에서 비롯되는 매일 매일의 고달픔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심한 설계와 꼼꼼한 시공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가져야 할 기초적인 생각은 외벽의 총량을 줄이고 여닫거나 들고 나는 창호를 적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너지 손실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세 번째는 ‘솜씨 있고 진지한 건축가가 설계한 품격을 갖춘 집’이다.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이 반드시 품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저렴한 비용이 남루함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초가집이 검박하지만 남루하지 않은 것처럼, 백자항아리가 질박하지만 추레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품격의 필요조건은 어울림이고 어울림의 필요조건은 편안함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형태와 쓰임직한 곳에 쓰임직한 재료를 선택해 사용하는 일이다. 이는 설계의 핵심이므로 진지한 건축가들을 만나는 것이 상책이다. 집 지을 사람이 쏟는 정성의 일부만 헐어내 진지한 건축가를 찾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당연히 설계비가 지불되어야 한다.
마지막은 ‘기꺼이 동네에 배경이 되는 집’이다. 다시 말해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는 집이라야 좋은 집이라는 역설 아닌 역설이다. 내 집이 소중한 것처럼 이웃들의 집도 내 집 이상의 소중한 개인 자산이며 더불어 보듬어야 할 공동의 동네 자산이다. 스스로 나서기를 꺼려하는 집이라야 싫증이 나지 않을뿐더러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기억과 시간을 담을 수 있는 집이다. 그래야 오래 머물 수 있다. 이를 위해 배려와 물러섬의 집짓기가 되어야 한다. 집 앞의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이웃집의 풍경과 일상에 대해 배려하는 집이 좋은 집이다.
살구나무집 이야기, 그 후
‘살구나무집’으로 사는 곳을 바꾼 지 어느 덧 1년 반이 되었다. <아파트와 바꾼 집>에서는 새 집에서의 생활 9개월의 변화를 담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변화는 더욱 흥미롭다. 집 앞 도로의 눈 치우기에서 시작된 어른들의 안면 트기와 오가기가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번져 그들은 스스럼없는 동네친구가 되었고, 지난달에는 아이들 몇이 어울려 배낭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주말의 한가한 시간이면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으며 강아지들도 덩달아 내남을 가리지 않고 이웃을 따라 나선다. 야생화 기르기의 노하우를 넌지시 건네기도 하고 이웃집 일에 힘을 보태거나 솜씨를 나누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음식을 나누거나 식재료를 공동 구매하는 일 역시 별스러울 것이 없는 동네 생활이 된 지 오래다.
마당의 꽃이며 나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기 위해 주말 오후가 되면 느린 걸음으로 윗집이나 옆집으로 나다니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며, 힘을 모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도와 달라 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당에 놓을 나무 의자를 함께 만들어 나누기도 했고 늦은 밤 혼자 즐기기에 아까운 뒷마당의 꽃향기를 함께 나누고자 이웃들에게 방문을 청하기도 한다. 마당일에 필요한 장비나 공구는 편안하게 빌려 쓰고 돌려주는 일이 이웃 사이의 규범이자 상식이 되었으며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버리기에 앞서 이웃에게 소용될 것인지를 먼저 묻곤 한다.
아파트 권태 증후군은 봄 눈 녹듯 치유되었다. 아파트 시세 등락 소식에 웃거나 찡그리는 일도 사라졌다. 아이들은 서둘러 귀가하여 시간의 변화가 만들어주는 세상의 변화에 기꺼이 탄성으로 참여한다. 아침에 일어나 편안한 차림으로 신문을 가져와 마당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해가 들지 않은 마당에 시원하게 물대기를 하는 풍경이 제법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이웃과 말을 건네고 인사를 나누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사는 곳을 바꾸니 새로운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시간을 달리 쓰게 되었다. (출처 : <Esquire> 2012년 7월호,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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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의 마지막에 쓴 것처럼 주말인 토요일 저녁 해가 넘어가기 무섭게 마당의 나무와 각종 야생화에 물을 주며 며칠 동안의 풍경 변화를 사진으로 담아두었고, 담장 너머 집 옆 텃밭의 고구마와 가지, 고추, 땅콩밭도 가뭄에 시무룩한 표정이어서 담장 너머로 시원하게 물을 대니 속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본격적인 여름이고 폭염이 계속된다는 소식에 사흘에 한 번 꼴로 마당에 물을 대지만 지독한 가뭄 때문인지 물을 주고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흙이 바짝 마르는 지경이다. 농사짓는 분들의 심정이 안타깝다.



